성실하게 쓸 수 있다면

에세이 모임을 시작하며

by 아기돼지

오래 전에 '신이 나를 만들 때'라는 짤방이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적이 있다. 뭔가를 만들고 있는 조물주의 모습을 어딘가 엉성하고 허술한 그림체로 유머러스하게 그려 놓은 이미지였다. 마치 요리사가 설탕 한 꼬집, 버터 한 덩이와 같은 적당량의 재료를 투하하며 음식을 만들 듯 그 그림 안에서 신은 어떤 특성이나 자질을 조금씩 넣어 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열정 한 스푼, 극소량의 미모, 그러다 실수로 그만 손이 미끄러져 투입된 대량의 게으름 등. 사람들은 이 이미지를 퍼다 다르며 자신의 캐릭터에 어울리는 단어로 '신이 나를 만들 때'의 상황을 재미있게 응용했다. 그 안에서 신은 자주 뭔가를 깜빡 잊고, 자꾸 재료를 손에서 놓쳐 특정 재료가 범벅이 되는 과오를 범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를 수습해보려는 의지 없이 적당히 얼버무린다. '아, 내가 이래서 이 모양이야.' 사람들은 적당한 한탄과 웃음이 섞인 글귀를 이미지와 함께 달았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며 자주 생각했다. 신은 나를 만들 때 '성실'이라는 덕목을 아예 잊으셨구나. 나의 성실하지 못함을 신의 불찰을 들어 변명하는 것이 상당히 불경하지만, 나에게도 해명의 기회를 허락한다면 나는 타고 나기를 성실하지 못한 인간으로, 그리고 그러한 특성을 후천적으로 공고히 해 나가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낙숫물로 댓돌을 뚫을 수 있다고 믿지만, 댓돌을 꼭 뚫어야만 하냐고 묻는 것이 나였으니, 신이 나를 만들 때 '성실'이라는 재료는 일시품절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지혜는 빌려올 수 있어도 성실은 빌려올 수 없다고 했던가. 성실은 의지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체의 영역이자 몸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것은 일정한 행위를 일정한 시간에 반복하는 일이었고, 그것으로 일상의 단단한 루틴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언제나 백기를 들었다.


글쓰기는 내가 참 좋아하는 일이었다. 몇 문장의 조합에 불과한 잡문에도 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나는 이따금씩 '글'을 썼다. 때로는 핸드폰 메모장에, 때로는 블로그나 페이스북 같이 공개된 곳에, 때로는 나조차도 다시 볼 수 없는 일회성 공간에. 독자는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해 쓸 때도 있었지만, 흰 창에 깜빡이는 커서만 보다 창을 닫아버린 적이 훨씬 더 많았다.


나는 '글'에 무슨 대단한 자격이라도 부여했던 것일까. 이건 글이 아니야, 이것도 글이냐, 와 같은 내적 판단 앞에서 글쓰기는 자주 요원해졌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기분이 들 때면 기꺼이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글을 높이고 나를 낮춤으로써 글 앞에서 나는 겸손한 척하는 영악한 불능자가 되었다.


성실하지 못한 자의 변명은 이렇게도 성립했다. '재능'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을 소환하여 나의 '하지 않음'을 '할 수 없음'으로 변모시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를 선택하는 것. 미래를 몽상하며 현재를 유예하는 것.


난생 처음으로 글쓰기 모임을 신청했다. 매주 글을 써서 공개하는 방식이다.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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