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이야기
소년은 열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 얼굴을 처음 보았다 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를 지나며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곳곳에서 갈등과 폭력을 불렀다. 말 한마디에 죽고 죽이는 야만의 시대에, 여기저기서 번진 유혈 사태와 학살로 인한 피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시절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었으나, 혹은 그랬기 때문에 좌익 활동을 지원하다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다. 그 세월이 십 년이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아버지 얼굴을 모른 채 컸다. 도처에 말 못할 사연이 가득했다. 그의 어머니가 어떤 심정으로 그를 포함한 다섯 남매를 혼자 먹여 살렸을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생의 과제이던 시절, 그는 자주 배를 곯고도 그 어린 몸으로 어미를 따라 다니며 일을 돕곤 했겠지. 다섯 남매 중 막내였던 소년은 무척 총명해 국민학교 시절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가난은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흔했다.
뒷산에서 나무나 해다 나르며 살기를 이 년째, 소년의 국민학교 선생님이 그의 집을 찾았다. 선생은 소년이 공부할 재목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모두가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그러니까 누군가는 누군가를 돌봤다. 선생은 소년을 끌고 교실 뒷자리로 데려가 공부를 시켰다. 그러기를 한 달, 소년은 중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갔다.
소년에게는 뛰어난 두뇌와 강한 집념이 있었다. 그리고 초조함이 있었다. 그는 또래보다 2년이나 뒤처진 자신의 출발선을 언제나 의식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지역 명문고에 진학한 후에도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영한사전의 얇은 종잇장이 완전히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수학 문제의 풀이 과정을 통째로 암기해 버릴 때까지 그는 자주 밤을 지새웠다.
그런 그가 국내 최고라 손꼽히는 대학의 법학과를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합격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전/후기 모집에 하나의 대학만을 지원할 수 있었던 예비고사-본고사 시절이었다. 재수를 결정하고, 그는 자주 초조했다. 이미 남들보다 3년이나 늦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그의 초조함은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타고난 성정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그는 주어진 일을 제 시간에 끝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만전을 기해 주어진 일을 완료하고도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인생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이듬해, 그는 전기 모집에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다 또 한 번 고배를 마시고 후기 모집을 통해 성균관대 법대에 진학하게 된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장학생 선발이었다. 그가 대학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마을 입구에서부터 집까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갔노라고 그의 어머니는 나에게 이따금씩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을 하던 그녀의 눈을 기억한다. 인생은 어쩌면 고통의 파도 속을 지나면서도 끝내 놓지 못할 몇 순간들로 인해 지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은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그는 아마 법조인을 꿈꾸었겠지. 법조계로의 진출은 직업군이 그리 다양하지 않던 시절, 한국 사회에서 출세로 향하는 가장 정확하고도 빠른 길이었다. 그는 기민하거나 센스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한 자리에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책을 읽을 수는 있었다. 읽고 쓰는 데에 능했으며 글의 구조와 체계를 단숨에 파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런 그를 뜯어 말린 것은 뜻밖에도 그의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법대에 진학하는 것도 마뜩찮아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그가 그의 뜻으로 법대에 진학하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는 사법고시 1차를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2차 시험을 준비할 즈음, 그의 주변엔 정체 모를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그의 동선을 지키고 주위를 맴돌았다. 충분히 잘 치렀다 생각한 2차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수차례. 그제야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연좌제로 인한 것임을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사법고시를 포기하라 전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법고시를 통과할 수 없었다.
그의 시계는 다시 한 번 늦춰졌다. 늦춰진 시간을 언제 다시 맞출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었다. 불안은 그를 덮쳤다. 그는 졸업을 유예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였을까. 이따금씩 심장이 심하게 조여오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공포와 공황이 발작처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그는 평생 공황과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가 서른일곱 되던 해에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내가 서른일곱이 되던 해에 그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일흔넷이었다. 일이년 더 사는 것이 그 누구를 위하는 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그의 죽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평생 세 명의 자식을 낳아 길렀다. 그 두 번째 자식이자 그를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은 내가 이 글을, 쓴다. 쓰는 것이야말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그다운 방식이리라. 매일 그를 생각한다. 아빠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