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남을 선물

by 박하



어제 아침, 부산에 계신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김 서방 생일이니깐, 꼭 미역국 끓여줘라. 알았제?”

며칠 전부터 이미 여러 번 들은 말이었다.

그래도 당일이 되자 못 미더웠는지 다시 한 번 확인 전화를 하셨다.


우리 집은 1월부터 4월까지가 ‘생일의 계절’이다.

1월 남편, 2월 큰아들, 3월 나, 4월 둘째.

해마다 이 순서대로 생일이 이어지고 나면, 봄이 온다.

언젠가부터 남편의 생일 선물은 단출해졌다.

선물 대신 생일상과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올해는 미리 MTB 옷을 선물했고,

혼자 스키장에 갈 수 있는 날을 얹어 주었다.


아들들에게는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큰아들은 무뚝뚝하지만 가끔 편지나 꽃으로 놀라게 하는 타입이고,

둘째는 다정하지만 기념일엔 늘 무심하다.

이번 생일도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남편은 생일날 보드를 타러 나갔고,

나는 오랜만에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국거리 소고기와 채소 가격 앞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하고, 반찬을 준비했다.

예전에 ‘한 요리’ 했던 시절의 손이 오래간만에 움직였다.


저녁이 되자 가족이 모였다.

공부하러 나갔던 큰아들도 들어오고,

치킨을 시켜 조촐한 생일상을 차렸다.


치킨을 뜯을려고 닭다리를 들더니 큰아들이 말했다.

“아차, 아빠한테 편지 줘야지.”

자기 방으로 달려가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아빠, 안방 가서 혼자 봐.”

“편지 읽다가 우는 거 아니야?"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울 수도 있을걸.” 아들이 부끄러운지 치킨을 먹으며 말했다.


생일 파티가 끝나고 나와 남편은 편지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함께 읽던 나는 눈시물이 붉어졌다.

너무 감동이야. 우리 아들 잘 컸다. 이 편지는 힘들 때마다 꺼내 읽어야겠다. 소중히 보관해야 겠어”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3 아들이 쓴 편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아부지에게

아빠한테 편지쓰는 오랜만이네요. 지금은 아빠 생일 3일전입니다.

아부지 저를 키워주시고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워낙 칠칠맞고 틱틱대서 제 성질 받아주신다고 고생 많이 하셨죠?

제가 앞으로는 남자답게, 든든하게 살겠습니다.

항상 저희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요.

저도 아빠처럼 열심히 살겠습니다.

제가 꼭 공부 열심히 해서 아부지 같은 멋진 사람이 되서 아부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항상 모지란 저랑 지성이 뒷바라지 해주시고 음식도 해주시고

집안일도 해주시는 아부지(원래 다 엄마가 해야 되는데...) 항상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화목한 가정의 한 가장이 되주세요.

저도 한 가장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습니다.

겉으로는 틱틱거리고 짜증내지만 속으로는 아버지를 아주 자랑스럽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생일 축하해 아빠 사랑해요

- 쬬-

남편도 읽고는 잠시 말이 없는 걸 보니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눈물 없는 사람인데도, 그날은 달랐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손글씨가 더 오래 남는다는 걸.

비싼 선물보다 진심이 담긴 문장이 더 깊이 들어온다는 걸.


밖에서는 세상 친절한 인싸중에 인싸인 아들

집안에서는 편지대로 틱틱거리는 아이였다.

편지속의 아들은 세상 다정한 아들이었다.


연애 시절, 우리는 편지를 많이 썼다.

작년 가을, 경주의 느린 우체통에 넣어둔 편지가

남편 생일 이틀 전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차 안에서 읽고 영상으로 답장을 보내왔다.

“고마워.”


올해 생일에 남편이 받은 선물 중

가장 오래 남을 건 아들의 편지일 것이다.

물질은 사라지지만 글자는 오래 남는다.

기억도, 마음도 함께 남는다.


생일날, 나는 다시 생각했다.

선물보다 중요한 건 ‘당신을 생각했다, 늘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이라는 것을.


생일은 지났지만

내가 남편에게 보낸 느린편지 마지막에 남긴 글로 마무리 한다.

'우리 앞으로 100세까지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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