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은 아쉽고 셋은 두려우니 둘을 낳기로 했다

“셋째도 낳을 거야?”

둘째 임신 중에도, 출산하고 나서도 주위에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더 낳고 기르다가는 내가 미칠 거라고 강한 부정을 한다. 암만 생각해도 셋 이상의 자녀를 키운다는 건 치가 떨린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 한 달이 지날 무렵 루프 시술을 받았다. 피임기구는 나를 단단히 지켜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부터 이왕 출산할 거면 둘은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 남매 중 둘째로 자란 나는 형제가 주는 각별한 에너지를 안다. 물론 형제끼리 사이가 안 좋았던 시기도 있었다. 그건 바로 문제의 사춘기 때다. 언니에게 대들다 언니의 발에 명치를 맞아 숨을 멎는 고통을 처음 맛본 후론 언니와 대화 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농성 여드름이 남동생의 얼굴을 뒤덮을 때쯤 남동생과도 데면데면했다. 그때의 나는 친구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 여겼고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집에 와서도 동생은 뭘 아냐며 이 누나는 사춘기니 건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동생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나만의 동굴에서 뒹굴었다. 어리숙한 동생은 내가 쳐놓은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 우리 삼 남매는 사춘기라는 가시밭길을 다 건널 때쯤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



언니와 사이가 좋지 않던 그 시절에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친구에게도 꺼내기 힘든 밑바닥에 깔린 고민을 건져서 내밀 수 있는 존재는 언니라는 거였다. 별거 아닌 고민이었을지라도 그 당시 나에겐 심각한 사항이었다. 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쭈뻣쭈뻣 망설이다 언니에게 토로했었다.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조언과 격려를 아낌없이 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모습을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그녀는 든든한 내 편이었다. 그 후로도 고민 많던 대학시절과 사회생활을 할 때도 언니는 위태로운 나를 등 뒤에서 받쳐주었다. 서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럴수록 나도 그런 언니를 닮고 싶었다.


형제끼리 어영부영 지내던 시기도 있었지만 나는 언니와 동생에게 다각도로 도움을 받고 기댔음을 인정한다. 형제가 있어서 생기는 단점은 장점을 한참 가리지 못했다. 형제란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을 공유하고 부모란 우산을 함께 쓰며 형제가 비를 맞지 않게 상대 쪽으로 우산을 기울어주는 이들이지 않을까. 그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서 따뜻한 연기가 풀풀 난다.

지금은 각자의 생활에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부모님이 상경할 때나 기념일일 때는 군말 없이 하나로 뭉친다. 오랜만에 모여 함께 왁자지껄 웃을 때면 형제가 있다는 게 더없이 소중하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서 배로 더 행복하고 즐겁다는 걸 크면 클수록 절감하고 있다. 5년 전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 여행을 가기 위해 삼 남매는 한 달에 3만 원씩 저금을 한다. 계좌의 금액을 조회해본다. 금액이 꽤 된다.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리며 기대된다.






내 자식도 내가 경험했고 지금도 느끼고 있는 형제애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음 같아서는 셋이라도 낳고 싶다. 그러나 핵가족화 시대에 맞벌이하는 부부가 아이 셋을 키운다는 건 자아가 그만큼 깎이고 깎여 소멸할 만큼 흐릿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두 명을 기르면서도 내가 걷던 길을 포기하고 아이들에게 속박된 삶은 나의 정체성을 가차 없이 흔들었다. 또한 임신하고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사회에 부딪히는 벽도 많았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6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여성의원이었다. 병원이다 보니 남자 직원은 손에 꼽았다. 초반에는 같은 부서에 임신 준비 중인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내가 첫 주자로 아이를 가졌고, 눈치 보지 않고 출산휴가와 육아 휴직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둘째를 계획 중일 때는 상황이 달랐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준비하던 동료들이 나까지 포함해서 세명이었다. 그러다 두 명의 동료가 나보다 먼저 임신했다. 그 말인즉슨 출산휴가도 엇비슷하게 들어가 인원이 부족해진다는 소리다. 상사는 임신 준비 중이던 내게 부탁했다. 너는 그들에 비해 젊으니 임신을 미뤄 줬으면 좋겠다고. 어이가 없었음에도 사표를 던지고 당차게 그만두지 못했다.(아… 돈의 노예여.)



그렇게 둘째 임신은 미뤄졌다. 자녀 계획에 붕 뜨는 시간이 생기자 생각이 많아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째를 낳지 말까. 임신을 하지 않으면 공백 없이 쭈욱 일할 수 있잖아. 무엇보다 아이 하나도 벅찬데 둘째를 낳는 게 과연 맞을까?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곧 아이를 깨우고 씻기고 옷을 입히고 식빵을 물려 차에 태워 7시 반에 어린이집에 맡겼다.(원장님이 우리 사정을 배려해주셨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출근하기 위해서는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못했다. 정신을 붙들어 매지 않으면 자칫 지각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매번 빠듯하게 도착했다. 언제나 분주히 출근했고, 급하게 퇴근했다. 저녁 7시 반.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대게 우리 아이와 2명의 아이가 남아 있었다. 늦게까지 부모를 기다리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다. 다른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세연이가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난 항상 걷다 뛰다 하며 어린이집을 향했다.



아슬아슬하고 쉴 틈 없이 빽빽한 생활에서 둘째를 낳아야 하는지,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머리가 복잡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신랑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하나 키우며 드는 비용과 둘을 키우며 나가는 비용은 확연히 차이 나니까. 둘은 낳아야 한다는 나의 고집은 그때 많이 흔들렸다. 신랑은 외동도 괜찮다고 말했다. 외동으로 자란 신랑은 외롭지 않았다고 했지만, 형제가 있는 나는 서로 의지하는 핏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기에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연이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고, 혈육의 뭉클함을 내 아이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내내 맴돌았다. 생각은 멈추지 않고 멀리까지 뻗어갔다. 우리가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났을 때 아이는 결혼해서 동반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혼자인 채 살아간다면? 그때 난 알았다. 육아의 고충보단 낳지 않았다는 미련이 나를 더 힘들게 하리라는 걸.



그래서 나는 둘째까지 낳기로 선택했고 그 길을 걷고 있다.

둘째를 낳고서도 걱정은 많다. 다시 일을 다니게 될 텐데 두 아이의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 못할까 봐. 아이가 아프거나, 전염병으로 격리 조치를 받거나, 입원을 하게 된다면 나나 신랑이나 직장에 월차나 조퇴를 마음처럼 쓸 수나 있을지. 아이 방학 때는 또 어찌해야 할지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진다. 더군다나 내 후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첫째.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한 달 동안은 적응기간이라고 해서 11시 반에 하교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저학년은 보통 2시 전에는 하교한다는데, 여건이 안되면 나는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시대는 아이를 마음처럼 낳기 어려운 시대인 건 분명하다. 하나를 낳더라도 경제적, 시기적, 환경적인 여건을 계산하며 답을 내려야 한다. 빡빡한 삶에서 둘째까지 낳는 건 꺼려질 수밖에 없다. 나도 많은 고민 끝에 둘째를 낳았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여기서 셋째는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육아만 하다 내 젊음을 더는 보내기 싫다. 직장을 그만둔지도 2년이 지났다. 사회로 발을 내딛기가 겁이 난다. 경단녀라고 말하기엔 그리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지금 이상으로 경력단절이 된다면 사회로 나가는 게 더욱 무서워지겠지.



그러므로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분만은 없다. 둘째를 낳고 보니 오랜 과제를 마무리한 듯 가슴에 묵직하고 불편하게 박혀 있던 돌덩이가 뻥 뚫린 듯 시원하긴 하다. 둘째가 돌이 지나니 잘 낳았다고 생각한다. 초반엔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나의 정신과 체력이 탈탈 털렸지만, 지금은 한결 나아졌다. (내가 적응한 것도 있겠지만.) 누나가 동생을 챙기고, 동생이 누나를 따르며 서로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싶다.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내 손이 덜 갈 때까지 버텨보자며 나를 다독이는 요즘이다. 이 시기만 지나면 힘든 고비도 지나갈 거라 믿으며, 나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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