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향적인 엄마도 괜찮아요.

나는 내향인이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내향성:외향성 = 7:3'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 점은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를 읽었을 때 알아차렸다.  

                          

내향적인 사람이 사회활동에서 피로를 더 빨리 느끼는가 하는 문제도 이 점이 잘 설명해준다.
자극에 반응하느라 인지 기능이 바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파티는 단순히 즐기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과 환경과 대화를 분석하고, 끝도 없이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그것을 자잘하게 쪼개서 봐야 직성이 풀린다.

- 피터 홀린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내향인들은 사람과의 만남 후 극도의 피곤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위에서와 같이 대화에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신경 쓰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갈지 계산하며, 상대에게 기분 나쁜 대답은 아닐지 분석하고 선택하느라 머릿속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뻗어버릴 수밖에.



그렇다고 내향인이 바깥 활동도 안 하고 온 집안 커튼을 내린 채 어둠 속에서만 지내진 않는다. 분위기를 휩쓸진 못해도 이러쿵저러쿵 수다도 잘 떨고, 첫 만남에서도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어떤 이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을까.

 “O형이죠?”

그들은 모를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 뒤에는 항상 노곤한 피로가 따라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회적 예의를 갖추느라 다른 인격이 되려 노력했다는 것을.



엄마가 되기 전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활동은 내 의지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되고선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아이를 통해 생기는 낯선 상황과 인간관계는 불편했지만 꼭 해야 하는 과제처럼, 엄마로서 해내야 하는 일... 무거운 말로 엄마의 의무였던 것.

7년 동안 엄마로 살면서 어려웠던 상황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해볼까 한다.     



1. 임신 중, 낯선 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하다.

임신하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낯선 이들이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비슷한 주수의 산모나 할머니들이다. 그녀들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몇 개월이에요?” “배를 보니 아들이네” “뒷모습을 보니 딸이네.”

뜬금없이 다가와 질문하는 것 이상으로 생경했던 것은, 들을 말만 듣고는 언제 말 걸었냐는 식으로 제 갈길을 가는 상황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바람처럼 스쳐가는 그들의 배짱은 놀라웠다. 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내게 말이나 걸었을까 싶은 사람들.     



 2. 조리원이 불편했다.

나는 조리원에서 친구를 만들지 않은 사람이다. 출산하고 몸도 마음도 어수선한 상황에서 누군가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할 마음의 넉넉함은 없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닌 아이를 매개로 인연을 맺는다는 게 내키지도 않았다.    

  

모유 수유 호출이 올 때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제발 수유실에 사람이 없거나 최소한으로만 있길 바랬다. 만약 사람이 많으면 시선을 피하며 들어갔고, 구석진 곳에 앉아 조용히 수유만 하다 나왔다. 조리원 프로그램도 한두 개 하다가 끝내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은 분명 편하기도 했지만 내겐 불편한 점이 더 많았다. 그래서 둘째 조리 때는 첫째로 인해 조리원에 갈 여건이 안되자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억지스러운 환경과 노곤한 관계들에 다시 나를 던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3. 산후 도우미의 마지막 근무 날을 세다.

도우미 이모님이 출근한 지 1주가 지났을 때 나는 디데이를 세고 있었다. 이모님의 마지막 근무 날을.

누군가의 도움은 당연히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어째선지 함께 있으면 피곤했다. 어떤 대화라도 해야 할 거 같았고, 일어나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내 집인데도 발을 쭉 뻗을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친구에게 상담하면 다들 이런 말을 했다.

“공짜도 아니고 돈 내는 건데 뭐가 그리 어려워. 편하게 있어.”

“굳이 대화를 왜 해? 하지 마.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     


그러나 내 성격상 그럴 수가 없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이모님과 나란히 TV를 보고 있으면 침묵으로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 어떤 말이라도 해서 어려운 분위기를 깨야할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빨리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해졌다. 이모님이 가시면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건 막막했지만, 어서 혼자이고만 싶었다.     



4. 문화센터를 기피하다.

난 여태 ‘문센’이란 곳에 가본 적이 없다. 내게 ‘문화센터’는 입벌린 사자 같았다. 나를 잡아먹을 거 같았다고 해야 할까. 아이에게도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판국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대화를 하다니.... 하~. 난 그럴 배짱이 없다.      


아기 엄마들과 있으면 생기는 일이 있다. 건너편 아기를 보다 그 엄마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안한 웃음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상대가 “아이 몇 개월이에요?”라고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럼 대화의 물꼬는 터진다. 그 후 겉핥기식의 대화를 하다가 어느새 사적인 소재로 대화가 옮겨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인연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다. 문센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경험하진 않았지만 친구, 지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문센이 끝나면 커피숍에 가거나 식사를 해야 하며, 단체 카톡방이 생겨 하루하루 왁자지껄 대화를 나눠야 하고, 이래저래 만남의 횟수는 늘어난다. 난 분명 엄마들 무리에 속해 어울려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을 것임을 알기에, 애당초 그런 자리에도 안 갔고, 그럴 기회도 만들지 않았다.      



5. (5살~현재 진행 중) 그럼에도 내향성을 넘어서야 한다. 엄마라는 의무로.

아이가 5살이 지날 때부터는 놀이터에서 친한 친구와 놀다 작별인사를 할 때면 난감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건 바로 서로 더 놀고 싶다고 아우성쳤던 것. 그러다 보면 친구네 집이나 우리 집으로 옮겨 2차로 놀기도 했다. 그 말인즉슨 친구 엄마와 있는 시간도 늘어난다는 소리. 취향도, 기질도 다른 엄마와 있는 건 머쓱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아이는 신났고, 나는 뒷꼴이 당길 듯 피곤했다. 그러나 아이가 좋다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엄마는 대외적인 자리에도 참석해야 한다. 아이의 재롱잔치나, 부모 참여 수업 같은 거다. 참석하기 전에는 몰랐다. 그 자리가 불편하리라는 걸. 그저 아이의 재롱을 보고, 아이와 함께 수업에 참여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그 안엔 알게 모르게 생기는 감정의 소모가 있었다.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엄마라면 상관없지만, 길에서든, 놀이터에서든 아이를 통해 한번이라도 인사를 나눈 사이라면, ‘인사해야 하나.’ ‘말 걸어야 하나.’ 같은 생각들이 즐비하게 된다는 것. 이런 감정의 소모를 알게 된 뒤로는 불참하고만 싶어 진다. 워킹맘일 땐 월차를 빼기 어려워 신랑이 대신 나간 적이 있다. 그땐 직장이라는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업맘이 된 후론 숨을 곳이 없다.








위와 같은 상황들을 겪으면서  다른 엄마들은 잘하는데, 내가 너무 어리숙해서 그런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여러 번 생각했었다.


 

엄마라고 꼭 개방적이고 털털해야만 하는 걸까.
어떤 엄마에게는 무리 지어서 하는 육아가 괴로울 수도 있고, 오픈도어가 감옥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폐쇄적인 건 아니다.
소수의 친밀한 이웃과 나누는 정담은 즐겁다. 아이 손님이건 내 손님이건 기대되는 손님을 맞는 일은 늘 설레는 일이다. 다만 엄마가 되었다고 별안간 대문을 열어젖히는 '위대한 개츠비'가 되지는 않는 것뿐이다.

- 이연진 <내향 육아> p.93


저자는 내향인 엄마로 먼저 걸어간 사람이다. 그녀는 내향적인 엄마에겐 당연한 감정이라고 토닥여 주었다. 그로 인해 마음이 단단해졌다.

    

남들이 하는 걸 안 한다고 문제인 건 아니다. 아이의 기질이 중요하듯 엄마의 기질도 귀중하다. 나의 성향 때문에 아이가 손해 보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기질의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일은 굳. 이. 발 벗고 만들지는 않을 거다. 그럴 바엔 제한적인 에너지를 아이에게 쓰는 게 낫지 않나 싶다.

혼자의 시간을 즐기며, 엄마로서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로 선을 긋고 싶다.


내 기질대로 흘러가는 육아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사진: © brannon_naito,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백치미 엄마의 소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