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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도 밤에 먹으면 살찐다고 말하는 엄마가 될 테다

내가 겪었던 상처가 딸에게 대물림되지 않길 바라며

내 아이는 날씬하다. 팔다리는 길쭉하고 군살이 없어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흡족하다.



어렸을 적에 난 통통했다. 어른들은 복스럽다며 내 양볼을 엄지와 검지로 잡기 일쑤였다.

통통한 몸매를 인지하게 된 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서다. 

통통한 건 뚱뚱한 거구나. 보기 좋은 게 아니구나.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사진 찍는 게 싫었다. 뚱뚱한 모습이 집중받는 게 싫었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사진을 찍어야 할 때면 양볼을 힘껏 빨아 쏘옥 들어가게 했다. 볼이 홀쭉해지면 통통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 다행히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보통 체중을 유지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다시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바나나 때문이었다. 여느 날처럼 다를 거 없던 저녁. 엄마는 잘 익은 바나나를 사 왔다. 저녁 9시. 

출출했다. 식탁 위에 노랗게 익은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군침이 돌았지만 살찌면 안 된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그런 모습에 엄마는 한 마디를 날렸다.

"바나나는 먹어도 살 안쪄. 먹고 싶으면 참지 말고 먹어."

"엄마 진짜야? 살 안쪄? 정말?"

"응! 진짜라니까!"

그날부터 나는 저녁 9시, 10시. 가리지 않고 바나나를 3~5개씩 입안 가득 먹었다. 배가 부르니 잠도 노곤하게 잘 왔다. 한 달이 지나자 몸이 이상했다. 등살이 저릿했고, 겨드랑이 아래가 거슬렸다. 손으로 만져보니 살이 적잖이 잡혔다. 놀라서 언니 방으로 달려갔다. 체중계에 올라가 보니 무려 4kg나 쪄 있었다. 1kg만 더 찌면 앞자리가 6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였다. 엄마에 대한 신뢰가 우르르 무너졌다. 어린 나는 너무 순진했다. 엄마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으니.



거실에서 TV를 보던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 바나나 살 안 찐다며!!! 맘껏 먹어도 괜찮다며!!!!!!!!!!"

그날부터 몸무게만 생각하면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밤늦게 바나나를 달고 살며 살이 쪄가는 딸을 방치한 엄마에게 배신감도 들었다. 앞으론 절대 엄마 말은 믿지 않겠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녁에 먹는 습관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손은 여기저기로 뻗으며 입안으로 넣어댔다. 몸무게로 스트레스를 받으니 먹을 게 더 당기기도 했다.

그러다 고3이 됐다. 밤늦도록 공부하는 날이 많았다. 성적에 대한 불안은 체중을 더 불어나게 했다.

어느새 몸무게는 65kg.

믿기 싫었다. 내 몸이 너무 싫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엄마의 말 한마디로 시작됐다는 원망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엄마가 그때 사실대로만 말해줬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미워하고 또 미워했다.



20살을 시작으로 30살까지. 근 10년 동안 앞자리를 5로 바꾸려 온갖 다이어트를 했다.

유행하던 다이어트는 물론 헬스장도 전전했다. 대학교 때는 다이어트 업체에 다니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했다. 알바비는 몽땅 다이어트 고주파 시술을 받는데 쓰기도 했고, 다이어트 한약을 사는데 탕진하기도 했다. 

돈을 들인 것보다 효과는 더뎠다. 화가 났다. 난 또 먹어댔다. 위태로운 다이어트와 극단적인 요요는 반복됐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었다. 난 체중의 굴레에 깊이 빠져있었으니까.

그러다 인생 최고 몸무게인 69kg에 도달하고 만다. 때는 대학교 3학년. 

숨고 싶었다. 방학 동안 살찐 모습이 친구들의 관심을 받는 게 두려워 휴학하고 싶었다. 

대학교 때도, 졸업하고서도, 사회생활을 할 때도 퉁퉁한 모습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내게 다가온 기회도 머뭇거리다 잡지 못했다. 

살만 안 쪘어도. 항상 살. 살. 살. 만 안 쪘어도 잘 해낼 수 있었을 텐데라며 자책했다.



졸업하고는 무대 영상 회사에 입사했다. 밥 먹듯 야근을 했다. 팀장님 실장님 팀원들과 밤 10시면 야식을 먹으러 나갔다. 

먹기 싫었지만 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30대가 됐고, 간호조무사로 전직했다. 3번째로 이직한 난임 의원에서 일하는 건 고됐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안 했는데 3달 만에 8kg가 빠졌다.

기쁘면서도 허망했다. 그렇게 살 빼려 악착같이 다이어트를 했는데... 살 빼는데 쓴 돈과 시간들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리곤 눈을 부릅뜨며 다짐했다. 절대로! 다신! 살찌지 않겠다고. 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래서 첫째 임신 때도, 둘째 임신 때도 몸무게에 더욱 신경 썼고, 출산 후에는 악착같이 원래 몸무게로 원상 복귀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주 3일 홈트레이닝을 하며 근력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앞자리가 5가 되니 사는 데 주저함이 없다. 주눅 들었던 자신감도 활기를 띤다.

허벅지 뒷면에 쫙 깔린 셀룰라이트를 볼 때마다 과거의 고통과 마주한다.

다신 살찌지 말아야지. 다신 살쪄서 고통받지 말아야지.

내 딸은 표준 체중을 지키며 크길 바란다. 44 사이즈를 말하는 게 아니다. 표준 체중을 말하는 거다. 

내가 겪었던 상처가 딸에게 대물림되지 않길 바란다. 꿈과 목표가 몸무게로 억압받지 않고, 가고 싶은 대로 훨훨 날아가길 바란다.

바나나도 밤늦게 먹으면 살이 찐다는 사실과 적정 체중은 당당하게 사는데 한 몫한다는 사실도 솔직히 말하는 엄마가 될 테다.

12년간 몸무게로 괴로워하던 시간이 내게 준 아픈 경각심이다.










이미지 출처: © yunmai,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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