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엄마가 잘 기억했다가 네게 도로 줄게

화장대 옆엔 5단 책장이 있다. 그곳으로 가서 세 번째 칸에 놓인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윗면엔 하얀색은 하얀색 세모끼리 보라색은 보라색 세모끼리  주둥이를 맞대고 있다. 스르륵. 뚜껑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본다. 두 개의 봉지가 담겨 있다. 하나엔 '2015.1.10. 토 배꼽 떨어짐♥- 세연이'라고 적혀 있고 나머지 하나엔 ' 2018.8.1. 떨어짐-세윤이'라고 적혀있다. 



2014년 12월 27일 첫째 세연이를 출산하고 삼 사일 후 산후조리원에서는 '내 아이만을 위한 탯줄 보관함 만들기 수업'을 열었다. 낯선 엄마들과 안면을 트는 게 불편했던 나로서는 참여하기 싫었다. 그럼에도 탯줄을 잘 보관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용기를 냈다. 오전 11시 5분 전. 어그적거리며 교실을 향했다. 큼지막한 테이블이 교실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이래 앉으나 저래 앉으나 서로 얼굴을 맞댄 체 앉아야 하는 구조다. 먼저 와 있던 강사님이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여기 빈자리에 앉으세요."    


 

책상 가운데에는 하얀색과 보라색의 두꺼운 색종이가 놓여 있었다. 어느새 6명의 엄마가 다 모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님들! 오늘 탯줄 보관 상자를 만들 거예요. 그럼 시작할게요." 강사는 앞에 놓인 샘플을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보라색 색종이를 집어 든 강사는 한 장을 먼저 반으로 접었다가 폈다. 그리고 그 절반의 반을 다시 접었다. 그 상태에서 반대쪽을 세로로 절반 접었다 펴고 한쪽면의 꼭짓점들을 가운데에 맞춰 세모로 접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딴생각을 하다간 설명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요래 요래 따라 하다 보니 자그마한 상자가 만들어졌다.  "어머님들! 만드시느라 너무너무 고생하셨어요! 식당에 가셔서 점심 맛있게 드세요!"     



엄마들과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일어났다. 난 상자를 두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주먹만 한 상자는 작았지만 그럴듯했다. 며칠 후 탯줄을 소독하려고 조심스레 잡았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톡 하고 떨어졌다. 응?! 간호사실에 전화했다. 탯줄이 떠난 자리는 움푹 들어간 채 붉그스름했다. 분주히 손을 움직여 마무리하던 간호사는 자그마한 봉지에 탯줄을 담아 내게 넘겼다. 말라비틀어진 오징어 다리 같은 게 내 손에 들렸다. 침대 옆 맨 위 서랍장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빈 공간 없이 딱 맞는다. 이대로 놓기엔 뭔가 허전했다. 펜을 꺼내 봉지에다 쓱쓱 적었다. 하트를 마저 색칠한 후 바라봤다. '2015.1.10 토' 배꼽 떨어짐♥ - 세연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근데 이거 언제 주지? 세연이가 대학생이 되면? 그때 주면 반응이 밋밋할 수도 있으니까 아기 낳으면 줄까? 그럼 더 감격하지 않을까?!!' 전해줄 시기를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 고민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그러니 전해줄 때까진 잃어버리지 말고 고이고이 보관했다가 아이에게 넘겨줘야 한다. 세연이를 낳고 두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자그마한 탯줄 상자가 버려지지 않도록 챙겼다.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될 물건. 절대로 버려져선 안될 소중한 증거물.     



엄마는 내가 기억 못 하는 순간을 알려준다. 2살 때는 사촌 동생이 내 우유병을 집에 가져가려 하자 후다닥 달려가 사촌동생의 손에서 우유병을 화~악 낚아채 도망갔고 사촌동생은 엉엉 목청껏 울었다.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아 엄마가 애를 먹었다고. 7살엔 슬그머니 고모 방에 들어가 한참을 안 나오더란다. 잘 노나 보다 했다고. 얼마 후 유유히 나오더니 앞머리가 1cm 만 남겨져 있었다 한다. 모두 엄마가 말해줘서 아는 이야기다.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를 통해 어린 시절의 조각조각을 알게 된다. 분명 존재했으나 내 기억 속엔 없는 순간들. 엄마가 알려준 조각들과 내가 기억하는 조각들로 어린 시절의 나를 간직한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기억 못 할 순간들을 전해주고 싶다.      



'작은 네가 올해의 여름을 잊어버려도, 엄마가 계속 기억해줄게' 우연히 본 일본 '글리코 유업' 광고 카피다. 나로 인해 알게 될. 그리고 도로 가져가게 될 아이들의 어린 시절. 나는 부지런히 기억해야 한다. 글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그리고 흔적이 남긴 물건으로. 아이들의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상자 안에 담긴 탯줄을 지그시 바라본다. 아이의 첫 숨. 아이의 존재의 시작. 그 순간을  고스란히 전해줄 거다. 탯줄을 전하면서 말해줄 테다. 엄마와 네가 연결되었던 실존하는 유일한 흔적이라고. 다시 뚜껑을 닫는다. 손으로 상자 윗면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화장대 옆 책장 세 번째 칸에 다시 올렸다. “엄마~엄마!” 둘째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는다. 세 살인 둘째를 안고 말했다. “네가 모를 시간을 엄마가 잘 기억했다가 도로 전해줄게. 알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바나나도 밤에 먹으면 살찐다고 말하는 엄마가 될 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