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지로 수국 키우기 실패는 예견된 건지도 모른다.
고수리 작가의 책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에는 수국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p.28]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 그때까지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생일 축하한다는 손편지가 전부였다. 어쩌지. 뭐라도 사가야 할 텐데... 풀이 죽은 채로 바닥만 보고 걷던 그때, 문득 활짝 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국이었다. 색색의 수국 화분이 꽃집 바닥에 조르르 놓여 있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을 비닐 포장지로 감싸고는 '5,000원' 가격표를 붙여둔 채로, 하지만 워낙 꽃이 예뻐서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크기도 큼지막하니 선물로도 모양새가 괜찮을 것 같았다. 하늘색과 연분홍색 수국 화분을 샀다. 하늘하늘 분홍분홍. 소복한 꽃송이를 바라보자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산뜻해졌다.
-고수리,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이 글을 읽을 때만 해도 수국의 생김새조차 몰랐다. 한데, 1년이 지난 지금 난 수국에 푸~욱 빠져버렸다. 수국을 보고 있노라면 고수리 작가의 글이 아른거려서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품에 안은 수국과 함께 그날의 장면이 또렷이 조망됐다. 풀이 죽은 채 바닥만 보고 걷던 작가의 눈을 사로잡은 수국의 꽃송이들, 워낙 꽃이 예뻐서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에 놓였을지라도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 친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수국을 선물했던 건지도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백하면, 우리 딸이 아니었다면 고수리 작가의 글을 한껏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수국의 매력도 영영 알지 못했을 거다.
얼마 전 옥상텃밭을 꾸리기 위해 온 가족이 화원으로 출동했다. 화원의 규모는 엄청났다.
모양새가 같은 화원이 다섯 군대나 쪼로록 붙어 있었다. 그 화원이 그 화원 같았다. 이름 모를 장엄한 나무, 형형색색의 꽃들, 귀여운 다육이와 농염한 양귀비. 그 외로도 다채로운 빛깔의 꽃들이 화원 안과 밖을 조밀히 채우고 있었다.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맨 끝 화원에 도착했을 때, 화려하게 올림머리를 한 중년 아줌마가 서글서글하게 다가왔다.
"원하시는 거 있어요?"
"옥상에 텃밭 좀 꾸릴려는데요."
어머니와 주인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 꽃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세계에 들어간 거 같았다. 뭐랄까. 작은 정글 같았달까. 큰 나무들은 천장까지 뻗어 있고, 색색의 꽃들은 사이사이를 메꾸고 있었다. 화원 안은 습했지만 풀내음이 그득했다. 세연이는 나의 손을 잡아끌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말했다.
"엄마 나 꽃 사고 싶어."
"응. 온 김에 골라봐~ 세연이가 마음에 드는 걸로."
아이는 망설임도 없이 고른다. 수십 개의 연분홍 꽃송이가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송이는 채도를 달리 했다. 볼수록 예뼜다. 이런 꽃도 있구나. 마치 프레임에 감성 필터를 적용한 듯 보는 나까지 감성적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양 손으로 수국 화분을 꼭 쥔다. 이름도 지어준다. 하트꽃이라고. 하트 모양과 비슷하다나 뭐라나. 어쩜 이리도 예쁠까.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집으로 돌아온 세연이는 화분을 꾸며줘야 한다며 물감과 붓을 꺼내 큼지막한 하트를 그린다. 아이의 하트 그림과 수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하트랑 비슷하네 싶다가도, 만약 꽃송이들이 하트 모양이라면 어떨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수국의 개화시기는 6월부터 시작하여 7월이면 본격적으로 풍성하게 핀다. 수국의 수자가 물수(水)이 듯 물을 좋아한단다. 그래서 나와 세연이는 부지런히 물을 줬다.
한데 어느 날부턴가 꽃잎들이 회색빛으로 변하며 마르기 시작했다. 물을 덜 줘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더 부지런히 물을 줬다. 2주가 지났지만 나아질 기미는커녕 오히려 상태가 안 좋아졌다. 이 상태는 뭐인 거지. 알 길이 없어 인터넷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어느 영상에서 수국 도매 대표님이 푸근한 인상으로 말했다.
"수국을 시중에서 구입해서 잘 죽여버리고 또 꽃이 잘 안피어불고 그런다고 고객들이 이야기를 해요. 딱 세 가지만 주의하면 됩니다.
1. 오전에 물 주기(해 뜨고 2시간 뒤가 적당~오후 2시 이전에)
2. 가지 치기(꽃이 핀 가지를 7월 말에는 자른다.)
3. 저온 시기를 반드시 거쳐라.
아침에 직장인들이 바쁘니까 출근하고 저녁에 와서 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을 저녁에 줘불면 해가 없는 상태니까 광합성을 못합니다. 화분 안에 물이 그대로 고여 있게 돼요. 물이 고여 있으믄 뿌리가 썩습니다 썩어! 그라고 밤새 고인 물로 시달린 뿌리는 아침에 물을 먹을래도 못 먹습니다. 주인은 다시 퇴근하고 시들었다고 또 물 주고! 밤마다 물줘불면 밤마다 죽어나서 한 달 안에 죽습니다. 허허허. 그러니까 수국 화분의 물은 해 뜨고 2시간 뒤가 가장 적당하고 적어도 오후 2시 이전에는 줘야 합니다. "
오전에 물을 줘야 한다는 설명을 들을 때 아차 싶었다. 나 역시 딱 대표님 말대로 하고 있었던 거다. 정신없이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면 운동을 하고 집안 살림을 한 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남은 시간이 아까워 점심을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둘째 하원 시간. 데려와 놀아주고, 저녁 준비를 하고, 첫째 귀가 시간에 맞춰 픽업하러 나간다. 그때서야 까먹고 있던 수국에 물을 준다. 시간은 5시.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무한 반복. 시간 상관없이 꽃에 물만 주고 햇빛만 비춰주면 잘 자라는 줄 알았다. 가장 기본적인 거조차 몰랐던 나. 수국을 다시 쳐다본다. 회색빛으로 말라버린 꽃송이와 푸르던 잎은 가장자리부터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
수국은 죽은 걸까. 시든 걸까. 썩은 걸까.
나의 무지로 수국 키우기 실패는 예견된 건지도 모른다. 안쓰럽게 말라버린 꽃송이를 보고 있자니 미안해졌다. 수국은 죽고 나는 살아 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수국을 알려했다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난 수국에 대해 알고자 했어야 했다.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해선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싶어 하듯이 말이다.
실수를 한 후에 그것을 배우느냐 버리느냐는 나의 몫이다. 부딪히고 깨지고 경험하며 하나의 사건을 지날 때마다 시각은 달라지리라.
사람마다 성격과 취향이 다르듯, 꽃마다 성질도, 관리법도 달라서 그에 맞춰야 한다는 걸. 꽃도 사람 대하 듯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야 알고 만다.
물 주는 법, 삽화 방법, 과습 방지, 통풍시키는 법. 하나하나 곱씹으며 메모한다. 내년에는 기필코 수국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건강한 꽃송이들과 만나겠다고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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