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1주년, 어떤 선물도 케이크도 촛불도 없었다

기념일이 매일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by 금머릿

“퇴근길에 케이크 하나 사올텨?”


퇴근을 앞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녁 준비를 하다 갑자기 떠올랐다. 오늘이 우리가 결혼한지 21년이 되는 날이라는 것을. 달력에 아무리 체크를 해두어도, 휴대전화에 알람을 설정해 두어도 희한하게도 당일에는 잊게 되는 것. ‘일상에 찌들어서’ 또는 ‘나이가 들고 기억력이 감퇴 되어서’ 등의 이유를 대보지만, 실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날이 가기 전에 기억이 났으니, 축하는 하고 지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남편에게 알렸다. 남편은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라는 답변이 바로 올라왔다. 특별할 것 없는 메뉴로 저녁상을 차리면서, 자연스레 지인들의 기념일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느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이야기가 제일 흔하긴 했다. 둘의 기념일이지만,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함께 그날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 결혼기념일을 그야말로 기념하는 꽃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목걸이를 받았다느니, 여행을 다녀왔다느니.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지인들의 경험담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속상함이 삐죽 올라오곤 했다. 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는데, 라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남편이 그날을 기억하는지 아닌지에 집중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원망을 퍼붓던 날들도 있었다. 나의 생일에 주로 그랬고,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그런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발작을 하지 않는다. “왜 기념일에 나만 선물을 해야 해?”라는 남편의 말이 뒤통수를 때린 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나의 의식 속에는 ‘기념일에는 남자가 잘 기억해 두었다가 여자를 위해 감동적인 이벤트를 마련해야 한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생각이 언제 생겨나서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 과정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얼마나 나 자신을 괴롭히고, 상대를 괴롭혀 왔던가. 그 어리석은 편견을 나는 몇 해 전에 버렸다.


지난 주말, 기념일이 다가온다는 이유로 세 아이와 함께 외식을 하긴 했다. 캠핑장처럼 꾸며진 식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케이크 하나를 준비해서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불었다면 딱 결혼기념일 이벤트였을 텐데. 우리는 그날 케이크 준비하는 것을 잊었다. ‘에이, 케이크는 당일에 먹어야지.’ 나의 말에 남편도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러나 남편은 케이크를 사 오지 않았다. 퇴근하는 1시간, 그 사이에 잊은 것이다. 저녁을 다 먹고 냉장고를 살피다, 케이크는? 이라는 질문에 남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헛웃음이 나왔다. 크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나 역시 낮 동안 생각 못 하다가 저녁에서야 겨우 생각난 것 아닌가.


그런데 남편의 마음은 영 불편했던 모양이다. 배달주문을 하자며, 배달앱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꼭 케이크가 먹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야말로 기념을 위한 케이크이지, 저녁을 다 먹고 달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케이크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남편은 집요하게 배달앱을 살폈다. 각종 전문점을 검색하다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시선을 돌리더니, 대뜸 아이들을 향해 의견을 묻는다. ‘빙수 어때?’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여전히 고개를 젓는 나의 시선을 피하며 남편이 다수결을 외쳤다. 아이들은 즉각 손을 들어 올렸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내 의견은 자연스레 묻혔다.

케이크가 아닌 빙수가 배달되었다.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행복하게 숟가락을 놀리는 가족들을 보며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기념일 21주년. 어떤 선물도 케이크도 촛불도 없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후식을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빙수의 마지막까지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먹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념일을 겪고 보니, 기념일은 매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했니, 못했니’로 서로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아닌, ‘선물을 줬니, 안 줬니’로 상대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그저 함께함에 의미를 둔 소박한 기념일.

앞으로도 우리의 기념일은 이럴 것 같다. 나쁘지 않다. 성실하게 서로의 자리를 지켜내 준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고맙고 대견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오글거려 뱉지 못한 말을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해 보면 어떨까. 여보, 사랑합니다. 21년이라는 세월, 함께해 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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