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학원물이 아니었다
“X발, 개x끼야....발, x발, 어쩌라고 X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평생 들은 X발을 한꺼번에 몰아 듣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보고 있는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놀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 어떻게 그런 저질스러운 영상을 보고 있는 거야?’라는 경멸의 눈이었을 것이다. 남편도 당황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니야. 드라마야, 드라마. <약한 영웅>이라는.”
“약한 영웅?”
영웅인데 약하다는 반어적 표현에 관심이 갔다. 앞에 앉아 있던 둘째가 그런다. “그거, 원래 웹툰이야.” 솔깃했다. 요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참 많은데, 대체로 꽤 재미있다.
웹툰으로 이미 인기가 있으니 드라마로 제작이 된 것일 테고, 기술이 뛰어난 방송가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니 완성도가 높을 거라는 기대가 앞섰다. 얼마 전에도 본 드라마 <마녀> 역시 너무 재밌게 보았다.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다름 아닌 ‘무빙’으로 유명한 웹툰 작가 강풀이었다. 역시, 인기 있는 웹툰은 분명 이유가 있고, 드라마로 제작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학습된 인간인 나는 ‘웹툰 원작의 드라마’라는 말만으로도 불편한 욕설 대사를 얼마든지 감당할 만반의 준비를 빠르게 이루었다. 예상대로였다. <약한 영웅>은 학원물이었고, 남자고등학교 아이들의 이야기였으며, 욕설이 난무하고 폭력 장면도 많았지만, 정말 흥미진진했다.
모범생이지만 약하지 않았고, ‘또라이 기질’로 못된 아이들을 혼내 줄 줄 아는 주인공 ‘연시은’은 그 안에 담긴 슬픔만큼이나 폭발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주인공의 두 친구, 안수호와 오범석 역시 참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위기 때마다 현란한 싸움 기술로 친구들을 지키는 수호를 보면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국회의원의 아들이어서 돈도 많고 사건을 조용히 수습할 수 있는 뒷배를 가진 범석이 착한 심성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돈독하게 우정을 쌓아가는 세 인물 때문에 보는 내내 흐뭇했다.
하지만 이들 캐릭터는 흔히 봐왔던 평면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 친구인 줄 알았던 이가 감정의 꼬임에 따라 적으로 변하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적인 줄 알았던 이들이 희한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돕는 인물로 등극하기도 했다. ‘적이야, 친구야?’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지만,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억지는 아니었다.
내가 살아본 세상이 아님에도, 얼마든지 그런 마음일 수 있겠다고 이해할 만한 스토리 전개였다. 연결되는 사건과 장면들이 개연성 있게 흘러가는 스토리 라인이 감탄스러웠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위기들이 이어졌고, 그것들을 해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인간미, 우정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요소들이 드라마 곳곳에 있었다. 드라마 자체가 19세 이상 관람가인 만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보고 싶었음에도, 폭력 장면이 너무 미화되는 것 같아,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폭력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복수가 답이 아니라’는 메시지는 참고 인내하는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났다. 하지만 끝내 그 폭력으로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에서는 ‘세상은 이럴 수밖에 없는가’라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또한 어른인 주인공 아버지의 ‘잘했어. 넌 아무런 잘못이 없다.’라는 대사가 시은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안심되면서도, 다음 폭력에도 정당성을 주는 것만 같아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별문제 없다고 믿고 있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행여나 나쁜 영향을 끼칠 만한 드라마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경각심이 들었다. “이런 불량한 아이들, 너희 학교에는 없어?”라는 물음에, 아들은 말했다.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보라고. 자기 주변에는 그런 아이들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들의 인간관계에 큰 위험이 없어 보여 안도했지만, 어딘가에는 또 이런 아이들이 존재하기에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드라마 속 어른들은 참 무자비하게 상처만 줄 뿐,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을 지킬 만한 힘이 없어 보였다. 어른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건지. 고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어? 이러면,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전학 간 학교에서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는 인물에게 시은은 말했다. 보는 나 역시 누군가를 괴롭혀야지만 만족하는 무리의 끝없는 시비가 지긋지긋했다. 이 아이들의 지독한 세계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끝이 있기는 한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Class 2’로 예고된 시즌 2가 기다려진다. 과연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 지긋지긋함이 해소될지, 아님 결국 ‘세상은 어차피 이런 곳이니 알아서 잘들 살아’가 될지. 시즌 2가 공개되는 25일을 기다려봐야겠다.
독감에 걸린 딸아이의 열 보초를 서며 찔끔찔끔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틀 만에 8편을 다 봐버렸다. 한 편당 분량이 짧긴 했지만, 분명 꽂혀서 본 게 맞을 테다. 연신 휴지를 뽑아들고 솟는 눈물을 닦아낸 걸 보면 말이다.
폭력과 슬픔, 우정과 인간미가 어우러진 이 드라마는 단순한 학원물이 아니다. 그 속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이 겪고 있을지도 모를 거친 세계가 담겨 있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게 세상을 배워가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을 함께 고민할 마음이 있는 분들의 시청을 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