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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AI 시대, 순수 창작물과 저자를 보호하기 위한 저작권법의 필요성

by 금머릿

초등학교 4학년 때, 대신 글을 써준 적이 있다. 주인집 딸이 교내 글짓기 대회에 출품할 산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었고, 나 역시 같은 대회에 글을 제출해야 했기에 내 글을 그 동생에게도 주었다. 곤란해하는 동생을 순수하게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동생은 최우수를 수상했고, 나는 수상하지 못했다. 초등 2학년이 쓴 글이라고 하기에는 수준이 좀 있었으나, 4학년이 쓴 글로서는 부족한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글이 별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기분이었고, 다시는 글 따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주인집 딸의 글쓰기 숙제를 도맡아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집주인은 딸이 상장을 받아 오니, 아주 기뻐했다. 그것이 자신의 딸이 스스로 쓴 글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집주인도 그 딸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상을 받아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접고 말했다. “좀 도와줘.” 도와준다는 것. 과연 매번 글쓰기 숙제를 대신 해 주는 게 도와주는 게 맞을까? 초등학교 6학년, 이사를 갈 때까지 나는 꽤 여러 번 그 아이의 글을 대신 써주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지금은 소식이 끊겨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대신해주는 숙제로 칭찬을 받던 관성을 버리지 못했다면, 결코 ‘괜찮다 할 만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대신 써주는 이가 있는 동안, 스스로 쓰는 법을 연습하지 못했고, 대신 써주는 이가 사라졌으니 막막한 기분으로 백지를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아이에게는 글을 써 주는 나란 존재가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나에게 글을 대신 써주는 일은 그 이후로도 있었다. 대학교 때, 짝사랑을 하는 친구의 가슴앓이가 안타까웠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나, 표현하지 못하는 친구가 안쓰러워 나는 제안했다. 편지를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친구는 편지를 잘 쓸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처음 편지는 내가 써주겠다고. 답장이 오면, 그때부터는 네가 쓰면 되는 거라고. 친구는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발 부탁한다며 두 손을 모으기도 했다.


나는 그간 읽어왔던 로맨스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썼다. 세 장에 걸친 편지는 그동안 내가 봐왔던 그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 진지함과 순수함에 대한 예찬이었다. 앞으로 좀 더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분명한 의지를 담은 편지가 친구를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다.


답장이 올 줄 알았는데,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전화상으로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가 굉장히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귀는 다음 수순을 밟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친구는 설레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서너 번 더 이어졌을 뿐, 원하던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가 마음에 들어 했던 건, 편지였지, 친구가 아니었다.


세 아이를 양육하며, 숱한 글쓰기를 옆에서 봐왔다. 좀처럼 글을 써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대신 써 주고 싶은 순간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인생 전반에 걸쳐 학습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글로 잘 되어봤자, 그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며 방향을 잡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단 한 번도 대신 글을 써주지 않았다. 쓰기는 싫고, 엄마의 방향성을 잡는 이야기는 어렵고, ‘그냥 엄마가 써주면 안 돼?’하고 아이가 투정할 때도 있었지만, 아이를 사랑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아이들은 간간이 학교에서 시나 산문 부문에서 상장을 받아왔다. 수업 시간에 작성했다는 글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때면, 생각보다 꽤 근사한 글에 두 눈이 동그래질 때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들은 써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써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도 할 뿐더러, 이제는 엄마보다 오히려 더 글을 잘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챗gpt를 사용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도무지 문장이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 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자료나 출처가 필요할 때나 맞춤법 검사가 필요할 때 이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글을 다 작성하고 그 글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요구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채팅로봇은 그 정확도나 속도 면에서 너무도 탁월하다. 어떤 사람보다도 내 글을 정성껏 읽어주고, 따스한 어투로 장단점을 이야기해 준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그 도구를 사용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애쓰고 있다. 하기 싫은 퇴고의 작업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주기 시작하면, 나는 도태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AI가 써준 문장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해도, 그가 제시한 글의 흐름이 탁월하다고 해도, 거기에 반기를 들 줄 알아야 나만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온 AI. 이제는 어떤 좋은 글을 대할 때, 의심부터 하게 된다. 이걸 정말 사람이 혼자 쓴 게 맞을까? AI의 도움을 받은 걸까? 아니면 아예 그 로봇이 다 써준 걸까?

이제는 이 글이 과연 사람이 쓴 게 맞는 건지를 검증하기 위해 AI를 활용해야 할 시대가 된 것 같다. 문학 작품과 같이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법이 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다. 끊임없이 저작권에 대한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창작물과 저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문제가 아니다. 법적 테두리를 좀 더 촘촘하게 세워나가고, 수준 높은 사회 인식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시대의 흐름을 사유 없이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 모두 AI 없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주인집 딸처럼, 짝사랑을 앓던 친구처럼.

인간 문명의 아름다움은 뭐니 뭐니 해도 문학으로 표현될 것이다.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희곡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돌아볼 수 있으며, 그 의미를 찾고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성된 AI의 작품을 작품으로 인정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한 아름다움은 더 이상 간직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저작권법의 발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법의 필요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창작물에 대한 AI 사용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의존을 놓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당당하게 순수 창작자라 밝히기 어려울 것이다. 법으로 보호받을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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