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_키워드, 바람/낙엽/기다림/온기/흔적 중에서 선택해 글쓰기
큰아이 방에 들어갔다. 2시간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이 방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발견한 일기장 때문이었다. 남편과 연애 시절에 쓰던 교환 일기 뒤편은 큰아이를 임신하면서부터 쓰게 된 태교 일기가 이어져 있다.
그걸 읽느라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그때의 감정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뭐가 그리 신기하고 기뻤는지, 과거의 내가 참 귀엽게 느껴졌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1주일 만에 집에 온 큰아이가 왜 자기 방에 있느냐고 물었다. 너 뱃속에 있을 때 썼던 일기를 읽는 중이라고 했더니, 자기도 읽고 싶단다. 태교 일기가 시작되는 곳을 펼쳐 놓고 나왔다.
주말 동안 잊고 있다가 아이가 기숙사로 가고 며칠이 지난 엊그제, 아이의 방을 정리하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태교 일기장 옆에 낯선 편지 봉투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여러 다른 봉투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가 선물해 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유독 한 봉투만 두툼한 것이 내용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노랑의 네모진 봉투, 아기자기한 스티커로 입구가 붙어 있는 봉투. 그것을 내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보는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연애를 시작한 지 갓 100일이 지난 아이의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여친과의 100일이 중요해서 절대 엄마 아빠의 일정대로 부산에 내려갈 수 없다며 난리를 쳤던 지난 연휴도 떠올랐다. 예약해 두었던 숙박업소를 모두 취소하고, 매일 빈 숙소가 없는지 검색하는 수고를 했고, 다시 예약해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 아이가 쓴 편지일까?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봉투를 손에 집어 들었다. 행여나 찢어질까 매우 신중을 기해 스티커를 떼어냈다. 역시나... 편지를 쓴 주인공은 아이의 여친이었다. 의도치 않게 가슴이 벌렁댔다.
아들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는다는 걸, 그 아이가 안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얼마나 나를 경멸할까. 그러니 읽지 않는 게 더 낫겠다는 마음의 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작해버린 읽기를 나는 멈추지 못했고, 끝까지 모두 읽었다.
그리고 으엑... 유치함에 혀를 내둘렀다. 느끼한 걸 먹었을 때, 김치를 찾게 되는 것처럼 나는 서둘러 우리 부부의 연애 시절 교환 일기를 펼쳤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유치하다 못해, 느끼한 거야? 우리 때는, 엉? 매우 깊이가 있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며, 엉?
아... 미스터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했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갑자기 철없이 유치한 글처럼 느껴졌다. 뭐지? 뭐지? 언제 우리가 이런 글을 주고받았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 안에 넣어 두었다. 순간, 고민이 됐다. 처음에 어떤 모양으로 있었더라? 스티커를 꼼꼼하게 붙인 다음, 원래 있었다고 추측되는 모양대로 놓아 보았다. 읽었다는 것을 눈치챌까?
그러면 왜 자기 방에 들어왔냐며 또 뭐라 뭐라 하겠지? 아니, 근데, 꼭 봐달라는 것도 아니고, 책상 위에 그렇게 버젓이 놓여 있으면, 어느 엄마가 안 읽고 배기겠냐고?
당당할 거다. ‘잘 보관하지 않은 너의 잘못이야. 난 읽으라고 놔둔 줄 알았어’라고 할 거다. ‘엄마가 읽는 게 싫었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잘 넣어 뒀어야지’라고 할 거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큰소리치는 연습을 했다.
그래 놓고서는, 나는 그 뒤로도 이따금 방에 들어가서 봉투의 위치를 바꿔 본다. 오늘 아이가 집에 오는 날이다. 가슴이 너무 떨린다. 봤다는 흔적... 남길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