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_가을에 가고 싶은 곳
유독 그런 날이 있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알아도, 오늘만큼은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픈 마음. 각자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잠시 눈을 돌려 너만을 바라보고픈 마음. 그 마음이 강하게 솟구치는 날.
실은 오늘만 그런 것도, 며칠만 그런 것도 아니다. 늘, 매일매일, 매 순간. 우리는 그렇게 함께하고픈 마음을 절제하며 각자의 공간으로 가야 했다. 이러는 게 옳아. 그래야 하는 거야, 라는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그러다 또록한 이성의 소리가 멀어지는 순간이 와 버렸다. 그날, 그 시간. 그러면 안 된다는, 누가 알게 되면 많이 속상할지도 모른다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비난하는 소리가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울려댔다. 그러나 그야말로 메아리, 점점 퍼지다 사라져버리는 소리. 더 이상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허공의 소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말했다.
“가자.”
“그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같은 마음이었기에, 흔쾌히 내민 손을 붙잡은 것이다. 이 일이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일이라면, 우리는 공범이다.
일생을 최선을 다하라는 목소리에 순종해 왔다. 할 수 없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탓에 더 이상 담을 인내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 가지 않는다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 그저 갈 수밖에.
날씨가 덜 좋았더라면,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있었을까. 그날은 하늘이 너무도 푸르렀고, 하늘을 닮은 바다가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날이었다. 높이 솟은 해가 뜨거웠지만, 빛을 받아 약동하는 조약돌이 마치 살아서 우릴 향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원하지?”
“응.”
“너무 예쁘다.”
“함께여서 너무 좋아.”
“사랑해....”
파도 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목덜미와 귓가를 간질였다. 단정하고 싶었지만, 제멋대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자유분방한 머리카락을 그가 자주 귓바퀴 뒤로 넘겨주었다.
작은 손끝이 숯불처럼 뜨거워 화르륵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마주하며 들여다본 그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였고, 사랑한다는 고백은 질리지 않는 꿀이었다. 우리는 누군가 어울리는 곳에 우리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그곳을 만끽했고, 서로를 만끽했다.
서너 시간의 일탈 후,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을 때, 우리는 굳게 다문 입을 한 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채우지 못한 것만큼, 내일 더 열심히 하는 우리가 되길, 오늘 많이 비워냈으니, 그 힘으로 다시 힘차게 달려 나가길, 그런 다짐을 굳게 다지며.
10년 후, 세 아이와 함께 그 바닷길을 다시 걸었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또다시 그때의 행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느라 지쳐 있고, 사랑이란 감정은 사치일 뿐이라고 느끼며 살던 그때. 여전한 모습으로 기다려준 그곳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알려주었다. 절대로 사랑은 사치가 아닌 반드시 꼭 붙들어야 할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숱한 장소들이 절정의 순간을 지켜내지 못함으로, 누군가의 추억마저 망가뜨려 버리는 일을 우리는 종종 보곤 한다. 수없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이 주는 위로와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나는 이 가을,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여전히 내 곁에 있는 나의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변치 않는 바다의 곁길을 변치 않는 그 마음으로. 그로부터 다시 10년. 그 길이 자꾸만 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