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검객

레비나스 읽기(8), 10월 6일 단상

by 김요섭


불가능의 도래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단전에서 서서히 시작된 운무는 발끝까지 닿았다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미세혈관처럼 퍼진 내력은 뇌를 거쳐 척추로, 다시 단전으로 돌아왔다. 그의 기는 막혔던 곳곳을 뚫고, 해체한다. 거미줄처럼 얇게 늘어나고, 단단한 알처럼 뭉쳤다가 다시 흩어져 부분이자 전체가 된다.


그는 운기조식 도중, 눈을 떴다. 세 번째 순환에도 여전히 닫혀있는 그곳을 도저히 열 수가 없다. 왼쪽 갈비뼈 아래가 완전히 폐쇄된 것 같다. 얼마 전부터 기의 흐름이 점점 탁해진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내기가 침투조차 못하는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수련이 부족한 탓이려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닫혀버린 것이 열리지도 않는 채 성장하고 있다.



장소 없는 장소


순환되지 못한 화기는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빠른 속도로 자신의 궤적을 만든다. 그의 심기가 뒤틀리며, 몸서리쳐지는 기억이 떠오른다. 내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이대로 계속하다가는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입을 것이다.


이제 그의 정신의 힘만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그것은 커졌다. '연공실 밖에는...' 그는 장소 없는 그곳으로 화기를 돌리는 일에 집중한다. 그의 열기와 욕망을 머금고 터무니없이 강해진 것은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다. 폭주하듯 휘몰아치며 자신의 의지를 획득한다. 사도로 변한 것이 자신의 소멸에 극렬히 저항한다. 그는 깊은 내상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화기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다. 한동안 격렬한 고통에 신음하던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흉폭해진 사자의 눈빛은 점점 텅 비어 간다. 그는 평온해졌지만 아이처럼 부드러워지진 않았다.



교란된 주체


늦은 오후, 햇살은 방안을 깊숙이 바라보고 있다. 볕이 길게 늘어지며 연한 노란색을 띤다. 침대 머리맡에 올려진 것이 드르륵 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급히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집으려 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공은 검기가 되어 날아가고 말았다. 강호를 떠난 지 10년이 흘렀지만 이런 실수는 처음이다.

그의 당황한 표정과 달리 손을 떠난 것은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다. 작은 단도 크기의 푸른 검기는 갈피를 못 잡고 회전하던 핸드폰을 공중에서 날카롭게 갈랐다. 그것은 힘없이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른 단검은 그의 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날아가 유리창 틀을 검게 그슬리고 멈췄다. 다행히 강화유리는 깨지지 않았으나, 미세한 잔금이 모세혈관처럼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공 수련을 할 때야 우발적인 일들은 수시로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호무림에 발을 들인 이후 이런 실수는 없었다.


도대체 이상한 기운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자신의 내력 어딘가, 허락도 없이 자리 잡은 이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심마(心魔)와 같은 어떤 것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강호를 떠난 지도 10년, 현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는 누구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갈비뼈 아래를 손바닥으로 슬며시 눌렀다.



'그러나 이 폐쇄성은 내재성으로부터 출구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출구가 있기 때문에, 외재성이 어떤 예견 불능의 운동을 통해 내재성을 향해 말 걸고, 그것을 향해 자기를 현현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격리된 존재에서 외부로의 문은 열려있는 동시에 닫혀있는 것이 된다.' -레비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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