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단상
스스로 빛나지 못하면 다른 빛이 필요해
중2 아들은 소환사의 계곡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빠 왔어?" 하고는 엄지손가락이 바쁘다. "아, 존나 짜증나, 그거 내껀데!" 분명 던전의 몬스터를 죽이면 나오는 희귀한 아이템을 누군가 가로챘을 것이다.
아내는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알은체를 한다. 아마 몇 시간 넘게 저러고 있었을 것이다. '줌마렐라 카페, 부동산 매매 투자 밴드, 공인중개사 시험대비 같이해요' 카페와 밴드, 단톡방 어딘가를 보물찾기 하듯 헤매고 있었겠지. 아들이나 아내나 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 너무 비슷한 느낌이다. 아내의 정수리와 엎드려 있는 아들의 발바닥을 쳐다본다. 그는 후줄근한 츄리닝으로 갈아입는다.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느낌, 나만 드는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옥상으로 올라간다. 삐걱거리는 녹슨 철제 비계를 밟는 걸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한 층씩 오를 때마다 공기가 달라진다. 2층 계단을 돌아설 때, 반달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옥상에 올라서서 초저녁 하늘을 둘러본다. 붉은 노을이 지평선으로 밀려나며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위로 검푸른 어둠이 당연하다는 듯 침습한다. 그는 서쪽 하늘을 올려다본다. 밝게 빛나는 금성이 홀로 하늘을 밝히고 있다.
사바세계의 근심은 온데간데없이, 무한한 밤하늘의 일부가 된 것 같다. 하늘과 맞닿은 그의 작은 옥탑방은 중세의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이 썩어빠진 세계에 유일하게 계시를 받은 이는 오직 자신 뿐이라는. 그곳에서 밤마다 읽고 있는 세르반테스의 책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그래 맞아. 난 말이야. 라만차의 마지막 기사로서, 정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진정한 기사의 본분을...'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아직 책의 3분의 1도 읽지 못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나간 것 같다. 어쨌든 옥상에 올라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뭔가 비밀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문득 신기하다. '아내와 아들도 핸드폰을 볼 때 이런 느낌일까?' 그는 잠시 갸우뚱한 표정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 딱히 꼬집을 수 없는데, 거기에는 '진정한 기사도'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한 몸, 정의를 위해 싸우는데 '집값이 오르는 게 걱정이 되거나, 누가 아이템 주워 가는 게 화가 나서야' 되겠는가 싶다. 밤하늘의 계시는 충분히 받았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그는 옥탑방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