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다르게 기억된다
니체 읽기(16), 10월 29일 단상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이상을 지니지 않은 인간보다 더 경박하고 파렴치하게 살아간다.' -선악의 저편 133절
검은 비
검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공허의 시간에 속한 것이 몸을 일으킨다.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는 철갑옷을 두드린다. 흰 말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결국 그는 깊은 숲까지 가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고통을 참으며 숲 언저리까지 절뚝거리며 걸었다. 더 걷지 못하고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쓴다. 맞은편 검은 산 위로 시꺼먼 구름이 이어진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의 투구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빗물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사방에 어둠이 깔려있다. 손발의 감각이 무뎌진 느낌이 든다. 팔을 들어 올리려 해 보지만 차가운 갑옷을 벗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식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본다. 아니라고 부인해보고 싶지만 자신의 가슴이 납득하지 못한다. 어깨를 들썩이며 마른기침을 한다. 고개를 계속 떨군다. 살아남았으나 정말 살아있는 것은 그가 아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분의 뒷모습은 선명하게 재생된다.
온몸을 찍어 누르는 듯한 강한 빗줄기는 그칠 기미가 없다. 대지를 습격한 것은 도착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흙을 가르고, 패고, 찢으며 곳곳에서 무수한 줄기를 형성한다. 기관 없이 형성된 신체는 서로 연결하고 합친다. 좁은 탁류는 구멍이 뚫리며 시내를 형성하고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어깨 위로 손을 올리려는 시늉을 하다가 곧 제지당한다. 온전히 홀로 감내해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 그는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비를 맞는다.
비는 바람과 함께 점점 더 거세게 포효한다. 모루 위의 망치질처럼 그의 갑옷을 뚫을 듯이 퍼붓는다. 철퇴를 맞아 움푹 패인 견갑, 날 선 검에 무수히 찍힌 흉갑의 자상은 담금질을 기다린다. 고통의 임계점을 기다리며 순진무구한 상태를 열망한다. 무한의 도가니에서 내려온 차가운 불덩이의 세례를 받으며 다시 한번 시작되길. 전투의 흔적은 다르게 기억될 뿐이다.
그는 슬며시 눈을 감는다. 다시 그분의 뒷모습이 보인다. 장검을 뽑아 든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그도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칼을 뽑아 든다. 그분이 먼저 뛰어나간다. 그도 두려움 없이 적을 겨누며 말에 박차를 가한다. 피가 뜨겁게 흐른다. 심장의 열기는 갑옷을 데운다. 갑자기 그가 사라진다. 낭떠러지도 없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그분의 호흡이 옅어진다. 더 이상 갑옷을 데우는 박동은 지속하지 못한다. 죽음의 흔적은 다르게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