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읽기(15), 리추얼의 종말, 11월 23일 단상
'반복은 리추얼의 본질적 특징이다. 그러나 집약성을 산출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리추얼은 루틴과 다르다.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반복과 기억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일어나는 동일한 운동이다. 기억되는 것은 지나간 것이며 뒤를 향해 반복된다. 반면에 진짜 반복은 앞을 향해 기억된다. 따라서 다시 알아보기로서의 반복은 맺음형식을 띤다.' -한병철
차이 있는 반복은 앞을 향해 기억된다
차이 있는 반복이 리추얼이다. 필연성의 '루틴'과 차이나는 '반복'은 다르다. 루틴은 해야만 하는 것에 얽매이는 시간을 살뿐이다. 뒤를 향해 반복되는 것은 직선의 시간성이다. 그의 지난날은 후회, 원한 감정과 관계한다. 찬란했던 기억은 현재의 왜소함으로, 억압받았던 기억은 수시로 재생되는 과거의 상흔으로, 그를 옥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얽매인 존재는 지금을 살지 못한다.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무는 미래를 향해 가지를 뻗을 수도 없다. 결국 그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집약하는 사건을 만들지 못한다. 산산이 조각난 존재로 파편화된 시간을 살뿐이다.
우연성이 없는 삶은 바깥이 없기에 기계적이다. 그는 필연성에 얽매이기에 우발적인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될 사건을 믿지 못하며, 그것을 위한 시간은 더더욱 살아내지 못한다. 고착화된 것은 같은 형식으로 괴롭힌다. 그는 지나간 것에 얽매이고 짓눌린다. 설사 아름다운 타자가 다가오더라도 감각할 수 없으며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발성의 언어가 없는 그는 과거의 기억을 반복할 뿐 새로운 현재를 살아내지 못한다. 충실하지 못한 현전의 삶은 너무 이른 죽음과 만날 뿐이다.
맺음형식
집약성을 산출하는 능력은 곡선의 시간성을 살 때 가능하다. '진짜 반복은 앞을 향해 기억된다'는 문장은 현전의 만족을 위해 그치는 '좋아요'가 아니다. 멀리서 오는 아름다움을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의미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이다. 차이 있게 반복하는 집약된 시간 속에 '장소 없는 장소'가 생성된다. 기약할 수 없는 만남을 위해, 계속되는 두드림이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다.
미래를 향한 주체로서 반복하는 존재만이 '맺음형식'을 창출한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원한 감정으로서의 기억을 끊어내는 결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존재의 형식은 과거의 원한을 '내가 원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는 더 이상 동일한 것을 재생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실낱같은 가능성을 발견해낸다. 그는 '진짜 반복'으로 과거와 미래를 엮어내는 고독에 정주한다. 비로소, 곡선의 시간성 속에 작은 흔적이 춤추는 별처럼 찍힌다.
'즉, 과거와 미래가 생동하는 현재에 통합된 형식이다. 맺음형식으로서의 다시 알아보기가 지속과 집약성을 창출한다. 다시 알아보기는 시간을 정주하게 만든다.' -한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