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애도, 프로이트 읽기

김준산 읽기(13), 지그문트 프로이트, 11월 16일 단상

by 김요섭



'우울은 애도와 다르다. 애도가 사랑하는 삶의 상실로 인해 밀려드는 의식적 슬픔이라면, 우울은 대상 없이 다가오는 무의식적 막막함이다.' -프로이트



우울과 애도


그는 우울하다. 살아남기 위해 새긴 무수한 상흔은 무의식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의식은 현존재의 명확한 파편만을 자신이라 확신할 뿐이다. 내밀한 욕망은 번번이 억압당하고, 일반적인 선택을 요구받은 지 오래다. 흉터의 흔적은 없는 것처럼 치부되고, 그는 또 하루를 산다. 그러나, 아무리 무감해지더라도 시스템 속의 상처는 여러 방식으로 들어오게 마련이다. 그는 헛헛하며, 대상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무기력하다. 삶을 살고 있으나, 남은 것은 벌거벗은 생존뿐이다.


억압된 것의 응력을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다. 우발적으로 드러난 일상의 균열은 어느 순간 도래한다. 오랜 기다림과 상처, 막연한 희망과 잔혹한 현실 어딘가. 비현실적인 장소는 갑자기 자상의 흔적처럼 나타났다. 평소 보이지 않던 어둠은 길고 엷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본다. 검은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아찔한 심도를 가졌다. 그는 머뭇거린다. 장소 없는 장소를 들여다보는 것도, 이를 회피하는 것도 두렵다.


더 이상 피할 수만 없다고 느낀다. 우울을 애도로 바꾸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는 슬며시 손을 넣는다. 어둠이 왠지 낯설지 않은 듯싶다가도, 낭만적 기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갑자기 검은 자상은 입을 활짝 열어, 그를 덥석 삼킨다. 축축한 어둠 사이로 딱딱한 흉터가 그의 얼굴을 스친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것에 베인 곳이 시큰거린다. 손을 짚으면 질척한 통로로 밀려들어간다. 얼른 손을 뺀다. 그가 중심을 잃자 바닥이 요동친다. 두려움에 뒤를 돌아보지만 어디든 짙은 어둠뿐이다.


그의 일부였으나 방치된 것은, 상처를 통해 반복적으로 기입되는 시스템을 닮아있다. 체제의 흔적이 그 안에 다 이해되지 못한 채 새겨졌기에, 무의식이 '카프카의 성'을 닮은 것은 무리가 아니다. 마치 수백억 개의 촉수에 미세한 융털을 덧댄 다중체처럼 무의식은 구조화되어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쌓인 상처는 지뢰처럼 곳곳에서 터질 수 있기에, 그곳으로 들어가는 일은 보통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을 열지 않으려는 완강한 흔적이 많기에 겹겹의 호위를 뚫어야 한다. 존재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과 무의식


복잡다단한 시스템의 구조는 수많은 대리인과 문지기를 앞세워 성으로의 접근을 거부한다. 체제라는 막연한 폭력은 거대한 벽으로 실재하지만 싸울 수는 없다. 보이지 않고 지배하는 것의 실체를 알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의 힘이 미치는 세계와 대리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 체제의 이면을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시스템의 어두운 씽크홀을 통과한 이후에 가능한 언어다. 민감하면서도 세밀한 감각이며 직관이다. 오직 실재의 언어를 가진 존재만이 우울을 애도로 바꾸며 억압의 실체를 발설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과정체가 될 때, 그는 다른 존재가 된다. 이는 바타유의 '작은 죽음', 들뢰즈의 '탈주', 니체의 '몰락'과 같은 일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처럼 쇼윈도에 전시된 이미지를 통해, 자본의 숨겨진 얼굴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의 거대한 절망인 거대 서사는 이미 끝났다.(리오타르) 세계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반복되기 어려우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미시 서사의 세부 세계다.' -김준산



아모르파티


우리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의 교환 관계 속에 가장 은밀한 지점까지 통제당한다. 세계는 너무나 공고하며 위반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탈옥할 수 없는 감옥에서도, 탈주는 가능할 수 있다. 미로에서 벗어날 수 없어도 도주의 순간마저 불가능하지 않다.


세계가 준 폭력의 흔적은 그것으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몰락이 패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울이 '창조를 위한 해체'가 되길 바란다. 비록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냉정한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주체의 욕망이 변하면 다시 해석될 수 있다. 상처를 입은 채로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일. 그가 밟고 있는 대지를 사랑하는 일이다. 존재를 온전히 환대하는 아모르파티다.


'비극은 인간 역사의 필연인 까닭에 비극을 긍정하지 않는 삶이 순결하거나 아름다울 순 없다. 삶을 희생하지 않고는 궁극의 경지에 닿을 수 없는 법이다. 절정의 비극은 정상의 아름다움이다.' -김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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