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17), 11월 13일 단상
'높은 감각의 강함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이 높은 인간을 만든다' -니체
리비도 부착과 원심력
'높은, 강함'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본질이나 기원이 있다고 믿는 것이며, 다수성과 허위의식에 기반한다. 특히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낮은 이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강함으로 감각되기 마련이다. 그들은 깃발과 싸우기보다 그 문양을 자기 것인 양 앞세운다. 자신의 비루함을 잊기 위해 완장을 차듯, 성급하게 리비도를 부착시킨다. 그러나 이는 체제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동을 고착시킬 뿐이다.
열대 저기압이 바다의 잠열을 흡수하여 태풍이 되듯, '높은 강함'은 낮은 자들의 공포를 삼키며 구심력을 높인다. 그러나 말인들이 시스템의 아비투스를 내면화하여, 하나가 된 느낌이 들더라도 그것의 원심력을 막을 수 없다. 체제는 항상 그들을 흡수하되, 배제하면서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전체의 부분이 되어 안전을 열망하는 에너지를 흡수하는 대신, 그들이 체제의 중심으로 오는 것을 막을 때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결국 낮은 자들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들의 욕망을 대리하며 생존할 뿐이다.
철학함
체제에 부착된 것은 지속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기에 근원적 지점에서 항상 여분이 남는다. 시스템 역시 말인의 고착을 환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낮은 자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지 말인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과 막연하지만 잃어버린 것의 느낌 사이에서 언어를 찾지 못한 존재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세계로부터 온 폭력에 맞은 이는 대상을 알 수 없는 슬픔을 처리할 방도를 알 수 없다. 수시로 밀려오는 헛헛함과 허기는 온전히 그의 몫이다.
지속하는 것이 존재를 바꾼다. 체제와 분리된 존재가 되는 일은 삶에 축제와 같은 순간이다.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봄날 이후를 살아내야 하는 지난한 과업이, 그에게 체제의 억압과 같은 강도로 던져질 뿐이다. 이는 서늘한 인간의 조건하에서 모순을 안고 사는 일이다. 단절과 망각, 막막함과 성스러운 긍정, 죽어감과 새로운 출발, 무거운 진실과 호모 루덴스, '사이' 어딘가.... 철학함은 이처럼 차가운 진실을 강도 있게 사는 일에 다름 아니다.
'공포의 긴장은 가장 먼 표적을 맞출 수 있다.' -니체
'공포의 긴장'을 잃지 않는 것만이 멀리서 오는 자를 환대할 수 있다. 언뜻 니체의 문장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기껏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했는데, 다시 공포의 긴장으로 돌아가라고? 그렇다면 체제 안의 공포와 밖의 두려움이 뭐가 다른 것이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긴장한다는 점에서 시스템의 작동과 형태의 유사성이 있으나, 실체는 다르다. 내부의 긴장은 시스템이 그에게 부과한 것이고, 외부의 긴장은 주체 스스로 부과한 과업에서 나오는 것의 차이다.
서늘한 진실을 사는 일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일이다. 시스템으로부터 도주는 새로운 시작일 뿐, 삶의 완성은 아니다. 그것은 '뜨거운 용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서늘한 용기'에 이르지 못한다. 지독한 모순을 품고, 부조리를 감내하는 것. 차가운 긴장을 놓치지 않는 일, 그것이 '가장 먼 표적을 맞추는' 일이며, 멀리서 오는 이를 환대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