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의 형태, 들뢰즈 읽기
김준산 읽기(12), 질 들뢰즈, 11월 11일 단상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 -들뢰즈
리좀의 형태
리좀적 배치는 천 개의 고원으로 가는 욕망의 통로다. 들뢰즈는 욕망을 광기, 재앙, 사랑, 아름다움과 같은 위상에 둔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폴리포니아'(바흐친)적 열림이 리좀인 것이다. 욕망이 다성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단일화되면 길을 잃고 만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곳이 대동맥의 큰 줄기밖에 없다면 몸은 경색되고, 존재가 완성되는 순간은 맞이할 수 없다. 미세하고 복잡한 모세혈관과 같은 형태가 욕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멀리서 온 타자인 무한의 아름다움은 경계에서 작동한다. 고목처럼 딱딱하고 단일한 형태로는 바깥을 생성해낼 수 없다. 유연하며 어떤 것이든 접속하는 '기계'가 되지 못하면 욕망은 죽고 만다. 싹을 틔우듯 수백만 개의 촉수를 더듬이처럼 외부로 향하는 것이 리좀의 형태이다. 그곳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지향하는 존재만이 '외부적이고 생산적 발아'가 가능하다.
리좀은 타자를 인식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환대하는 다중체다. 그것은 안에 있으며 동시에 바깥에 있다. 단일체가 아닌 잔뿌리의 형태만이 외부를 지향할 수 있다. 진리를 지향하는 다양체만이 광기, 재앙,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다. 이는 주체가 유한성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보는 일이며, 작은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다.
들뢰즈와 니체의 '나무'
들뢰즈의 나무와 니체의 수목은 다르다. 물론 생명의 약동이자 코나투스로서 강도의 차이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유목적 지점에서 둘의 사유는 갈린다. 힘에의 의지로써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니체의 나무는 대지를 긍정하며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들뢰즈의 노마드는 천 개의 고원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유동한다. 마치 니체의 나무가 계속 뛰어다니는 느낌이 든다.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이 좌절'된다고 들뢰즈가 말했듯, 탈주는 유목적 주체의 행태다.
알랭 바디우의 비판 지점도 천 개의 고원을 향한 탈주와 관련 있다. 그곳을 계속 유목하는 일이 과연 인간의 조건과 맞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유한성 틀로 사유를 가두자는 의미나, 실천성의 한계 안에서만 논의하자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단 하나의 과업을 최선을 다해 경주하다가, 대지를 긍정하며 추락하는 니체적 수목이 더 인간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노마드가 되어 탈주하지 않고, 파르티잔으로 끝까지 그곳을 지키며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삶은 어떤가?
천 개의 고원은, 적이 단 하나가 아니라 분산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진리를 향한 천 개의 모험의 측면에서 단 하나의 과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온갖 자극들로 분산된 작금의 시대에 내적 강도를 분열시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노마디즘은 자신이 두 발을 밟은 곳에서 다시 한번. 그리고, 몰락하는 일에서 니체보다 강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고원을 천 개처럼 오르는 자가 있고, 천 개의 산을 하나처럼 오르는 자가 있다. 물론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을 단 하나의 과업처럼 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밥벌이의 하부구조 속에 있는 우리가 어찌 그와 같을 수 있을까. 천 개가 아니라, 단 하나의 고원만이라도 자신의 일생 목표가 되면 어떤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만난 무한은, 단 하나의 정상에도 동일하게 열려있다. 멀리서 오는 무한에게 천 개의 산은 하나와 같다.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한의 일이지 유한자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단 하나의 적과 싸우는 과업에 충실하고자 한다. 아모르파티, 서늘한 용기가 더 아름답다.
'욕망의 생산적 사용을 다듬고, 다양체적 인간들이 조우해 리좀을 일궈, 더 높은 고원을 향해 분열하려는 의욕이, 욕망에 대한 온당한 이해다. 금욕을 금욕하고, 욕망을 폭발시키는 축제로서의 인간을 꿈꿀 수 있는 권리까지가 합당한 욕망 사용법이다.' -김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