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18), 11월 26일 단상
그의 도래
어느새 낯선 이는 다가왔다. 천천히 그가 몸을 기울인다.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이 기다릴 뿐이다. 느리게 그의 손은 살갗에 닿는다. 흉터 자국은 그녀의 팔과 다리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그는 따스한 눈길로 쓰다듬는다. 홀로 감내한 슬픔을 위무하듯 손은 더욱 느리게 흐른다.
기약 없는 도래를 기다리며, 촛불을 밝혔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꺼져버린 촛불에 서둘러 불을 붙이고, 타버린 심지를 긁어내며, 간절히 바랐던 순간은 너무도 갑작스럽다.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수줍은 어린아이처럼 쭈뼛거릴 뿐이다. 그을린 손바닥을, 그를 향해 슬며시 내민다. 기다렸다는 듯이, 낯선 이는 부드럽게 손을 맞잡는다. 그녀의 생채기와 화상의 흔적은 홍조를 띠기 시작한다.
순간, 그녀의 심연으로부터 끝 간 데 없는 것이 용솟음친다. 억눌린 것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다. 굵은 방울이 붉은 두 뺨에 하염없이 흐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정처 없는 존재로, 그곳을 향해 정주하려 했던, 모든 순간들. 배제, 단절, 불통, 그 어딘가, 찰나의 열림. 영원 같은 접속의 순간. 잊힐 수 없는 언어를 몸에 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녀는 온전히 그를 원할 뿐이다.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몸은, 지금 활짝 피어난다.
'계속할 수 없는 것을 계속했다고', 어린아이처럼 울먹인다. 하염없이 들썩이는 등을 토닥이며, 그는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온갖 불가능 속에도 기다리는 것 밖에는 몰랐다고', 그녀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본다. 말없이 눈물을 닦으며, 그는 바라본다. 촉촉한 눈망울은 영원의 시간성에 속한 듯 서로를 주시한다.
한참을 울고 난 그녀는 갑작스레 도래한 이에게 복잡한 심경이 든다. '왜 이제야 왔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그의 눈빛을 보면 온전히 납득된 것 같다. '어떤 존재도 내 마음에 닿을 수 없는 것을 몰랐어요?'라고 물으려다가 그의 토닥임에 모든 것이 아득해진다.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라고 말하려다 그의 어루만짐에 상처는 아물어버린다. 이해할 수 없으나 이해되는 것은 더 이상 아이러니가 아니다.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이상하게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온전히 그녀를 향해 있다고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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