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아름다움으로 가는 통로

윤리와 무한 읽기(10),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5일

by 김요섭



레비나스 : 제가 존재의 성질보다 지위에 관한 물음, 곧 존재의 존재론적 문제를 포착하여 후설 철학을 진술하려 했었다는 점에서,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 이론'에 대해 연구한 작품은 '존재와 시간'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중략) 존재와 시간의 불안, 염려,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현상학의 가장 유력한 실천을 목격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존재 내지 실존함을 기술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실존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존재와 시간'으로 말미암에 규정된 것인데, 하이데거는 혹자들이 그 책에 부여한 이런 실존주의라는 의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초 존재론의 장소로서만 인간 실존에 대한 관심을 보였을 뿐입니다.


네모 : 그럼 선생님이 특별히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에서 강하게 인상받은 점은 무엇인지요?


레비나스 : 스스로 존재하도록 활력을 불어넣는 지향성과 하이데거 현상학 이전에는 맹목적인 것으로, 단순한 내용들로 통용되었던 일련의 '마음 상태' 전체입니다. 이를테면 정서적으로 처해있음, 불안에 대한 대목들입니다. 하이데거의 분석에서 바로 대상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불안은 '무'에 대한 진실하고 적절한 접근이었을 텐데도 철학자들에게 파생된 개념, 부정의 결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베르그송의 환영처럼 말이죠. 하이데거가 보기에, 우리는 일련의 이론적인 전개 과정을 따라 무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 직접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실존 자체는, 마치 지향성의 결과로 비롯된 것처럼, 의미에 의해서 무의 원래적인 존재론적 의미에 의해서 활력을 띠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또는 인간의 원인에 대해, 또는 인간의 목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습니다. 실존은 바로 그 실존의 실존 사건 안에서, 불안 속에서, 무에서 나타납니다.



1.

'무'는 재앙의 아름다움이자 절대적 타자성이다. 존재는 죽음을 직면하는 사건 속에서 생성된다. 분리되지 못한, 명사형으로서 존재는 자신이 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시스템에 속한 직선의 시간성에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죽음 앞에선 존재, 무한한 타자성과의 조우가 그의 존재 사건을 바꾼다. '불가능, 완전한 무, 절대적 타자성'은 이미 도래해 있으나 품을 수 없다.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사건은 유한자를 엄습한다. 불안, 염려, 감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는 분리된 존재가 된다. 동사형으로서 존재는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2.

실존에 기입된 죽음은 '불안, 염려'로 유한자를 긴장시킨다. 무화되는 과정에 있는 그가 다시 현존재를 자각하는 것은 일상의 균열과 기입된 죽음을 통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 재구성하는 연금술은 절대적 부정성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로써 불안과 염려는 재앙의 아름다움으로 가는 통로이며 열림일 수 있다.


이는 성과 주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죽음 같은 부정성은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살아간다. 그는 너무도 가깝지만 너무도 먼 일상성에 매몰되어있다. 성과라는 허위의식과 긍정성의 환상 속에서 자신의 본래적 존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산다. 성과사회에서는 어떤 주체도 고유한 시간을 살지 못한 채 너무도 빠른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들의 미감은 '곡선의 아름다움'과 '재앙의 존재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다른 가능성을 알지 못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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