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의 시간성과 기투

윤리와 무한 읽기(9),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4일

by 김요섭



레비나스 : 사람들은 존재라는 단어가 대표적인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상습적으로 마치 명사인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프랑스어에서는 그 존재 또는 어느 존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이데거와 함께 존재라는 말에서 '동사성', 그 말 안에서 사건인 것, 존재의 '일어남'이 되살아났습니다. 마치 사물과 모든 것이 '존재에 관한 어떤 양식으로 몰리게' 되는 것처럼, '존재의 직무를 얻게'되는 것처럼 말이죠. 하이데거가 우리를 길들인 것이 바로 이러한 동사의 울림입니다. (중략) 이렇게 철학은 -비록 이를 깨닫지 못했던 때에도- 동사로서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네모 : 이 맥락에서 존재론이란 무엇입니까?


레비나스 : 그것은 바로 동사 '존재하다/존재'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존재론은 존재하는 것, 존재들, 다시 말해 '존재자들', 존재자들의 본성, 존재자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모든 분야와 구별됩니다. 이렇게 존재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존재라는 말의 의미가 설명되지 않은 채로 이해되어 왔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1.

존재는 완성될 수도 없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존재가 명사형이라는 것은 직선의 시간성에서 존재를 고찰하는 일이다. 어떤 사건도 없고 새로움도 없는 직선성은 존재를 가둔다. 숫자로 환원되고, 죽음을 향한 무의미한 시간을 살게 만든다. 명사형이 아닌 동사성, 오직 되어가는 사건 속에 존재는 되살아난다.


존재의 되어감은 현상학적 남성성의 시간에 곡선의 시간성을 기입하는 사건이다. 주름의 접힘, 비로소 열린 빈 공간, 달리는 선로에서 비켜 선 존재의 새로운 이야기. 자신만의 서사를 갖기 시작한 창백한 얼굴은 비로소 홍조를 띤다. 사유 없는 직선과 다른 시간성을 살며 그는 낯설어진다. 관성적 시간에 우발성의 사건이 기입될 수 있는 틈새를 열어둠으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생기한다.



2.

직선의 시공간 어딘가에 던져진 존재는 영문을 모르고 설국열차에 탑승해 있을 뿐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만 하는 시간에서 각도를 꺾는 사건, 바깥의 사유가 비로소 존재를 시작하게 한다. 차이 없는 그에게 찾아온 우발성, 현상학적 여성성, 곡선의 시간성은 피투된 존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선물한다.

열차의 바깥, 죽음을 향한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 그것은 자신의 피투성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일이다. 불안 속에 기분잡혀 있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각오이자, 삶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기투'라고 했다.


'이렇게 철학은 -비록 이를 깨닫지 못했던 때에도- 동사로서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는 의미는 죽음을 향한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사유의 모험을 통해 직선의 시간성을 어떻게든 다르게 만들어보려는 몸부림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온갖 불가능과 부조리에 처해있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도이며, 불가능의 가능성에 다가가려는 존재의 기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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