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11),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6일
네모 : 선생님에게는 언어가 이러한 근원적 중요성을 안 갖습니까?
레비나스 : 사실 저에게 말해진 것은 말함 자체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후자에서 정보를 이루는 내용은 대화 상대에게 말을 건넨다는 사실보다는 저에게 덜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저는 저의 (하이데거에 대한) 이런 유보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라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의 철학을 거쳐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상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건입니다.
네모 : 오늘날에는 확실히 교조적인 하이데거 주의자들이 있는데...
레비나스 : 그런 이들은 사유의 궁극적 준거점을 찾기 위한 여정의 우여곡절을 쓱싹한 이들이 아닐지. (중략)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자들과 대화하고 위대한 고전들로부터 완전히 현재적인 가르침을 요청하는 직접적이고 위대한 고전들로부터 완전히 현재적인 가르침을 요청하는 직접적이고 새로운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해석 작업이 수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해석이 낡은 것들을 조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지 못한 것을 사유와 말하기로 다시 가져오는 것입니다.
1.
애도는 대상이 있는 슬픔이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는 정서적 처함이다. 비록 사랑하는 이가 더 이상 곁에 없을지라도 '그의 죽음'이라는 구체적 사건이 있다면 애도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화할 수 없는 비실체적 죽음은 현존재의 피투성으로는 감내하기 어렵다. 그의 불안과 염려하는 모든 순간에 기입되어 있는 부정성은 드러내지 않으며, 심연의 눈으로 존재를 주시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무한성의 기표와 유한자의 인식으로 환원된 기의는 삐걱거리며 서걱거린다. 유한성에 자족하던 자아의 완고한 일상성에 자그마한 균열이 시작된다. 가늠할 수도 없는 절대적 타자의 보이지 않는 시선에 그의 분리는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도약과 같은 사건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불안과 염려, 막막함 속에서 자신의 본래적 실존으로 다가가려 하지만 계속 미끄러질 뿐이다.
직선의 시간성에서 생긴 교통사고와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더 이상 그를 이전의 안온한 존재로 회복시켜주지 못한다. 분리된 존재, 냉혹한 자유, 가능성의 불가능으로서 인간의 조건, 자신의 실존의 무게는 온전히 존재자의 몫일뿐이다. 유일한 선택은 곡선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몸짓, 낯선 존재가 되는 가능성의 발견이다. 시스템에서 분리되지 못한 이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계시받은 길을 걷는 일뿐이다.
2.
'생각하지 못한 것을 사유와 말하기로 다시 가져오는 것', '말해진 것은 말함 자체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는 레비나스의 언급은 죽음 앞에선 존재가 자신을 재해석하는 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없고, 애도할 수도 없는 죽음 앞에, 우리는 처해있다. 존재를 새롭게 하는 가능성으로 자신을 던질 것인지, 피투된 존재로 직선의 선로를 그저 달릴 것인지는 그의 선택이다.
존재를 재구성하며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살겠다는 결단은 관념적으로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일상의 구체성, 직접성 속에서 자신의 삶을 녹여내는 새로운 존재만이 가능하다. 이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완성되고 끝나버리는 일은 결코 아니며, 오직 계속되어가는 존재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서는 일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분리된 채, 쪼그려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는 일일지도 모른다. 무한한 허공을 올려다보며, 별을 어루만지는 손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머무는 일일지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서늘함일지도 모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