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칭적 그저 있음, 일리아

윤리와 무한 읽기(12),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7일

by 김요섭



레비나스 : 하지만 그에게 이 표현은 하이데거의 'es gibt'(그것이 있다)와 다소 비슷하게, 존재하는 것의 기쁨,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저에게 '그저 있음'은 비인칭적 존재 현상, 즉 (비인칭 대명사) '그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저의 숙고는 어린 시절 기억에서 비롯합니다. 사람들은 홀로 잠들고, 어른이 된 이들은 삶을 계속해 나갑니다. 아이는 자기 침대에서 '살랑거리는 소리' 같은 정적을 느낍니다.


네모 : 살랑거리는 소리의 정적이요?


레비나스 : 텅 빈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가까이 댈 때 들리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텅 빈 것이 꽉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정적이 소음처럼 들리는 것이죠.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나 저것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바로 존재의 장면이 열리는 것이고, 이것이 그저 있음입니다. 상상해 볼 수 있는 절대 텅 빔 속에, 창조 이전에 - 그저 있습니다.



1.

죽음을 향한 존재가 불안 속에서 현존재를 재구성할 때, 그는 충만하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피투성 속에, 기투는 존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위반이다. 단 한 번의 가능성은 어떤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한다. 비로소 불가능에 다가가는 유한자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하다.


극단을 허용하는 집중을 통해 유한성의 울타리를 넘어선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비록 찰나와 같은 순간이 지나면, 결국 무화되고 말지라도. 오롯이 자신의 결단으로 행한 것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이 있는 것이다.



2.

레비나스의 '일리아'는 그러한 존재의 기쁨과 풍요로움이 없다. 자기 원인이 없는 비인칭적 있음일 뿐이다. 존재의 내면성이 없는, 텅 빈 것은 나무나, 꽃, 바람처럼 그저 있을 뿐이다. 물론 내면성이 없다는 것이, 존재의 내재성과 강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레비나스가 비인칭적 있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도취적 내면성이 없다는 것이다.


일리아에는 오디세우스적 폭력이 없다. 남성적 주체가 판단중지의 순간, 자기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강렬함이 없는 것이다. 그가 세계를 향유하는 모험은 결국 낯선 것을 자신의 인식으로 환원시키고 말 뿐이다. 대상화된 타인 자의 낯섦을 소비하는 남성적 주체 사이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레비나스의 비인칭적 있음으로써 '일리아'이다.

낯섦이 사라지면 언제든 포획되는 '타인 자'가 아닌 환원 불가능한 '타자'로서 그저 있음. 그것은 대상화되고 향유될 수 없는 각자의 강도와 중심을 가진다. 주체의 인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일리아, 레비나스의 타자이자 신비, 울타리를 공유하지 않는 각자의 전체성이다.

생성과 욕망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추동하고 분출시키는 뜨거움을 레비나스는 차갑게 바라본다. 그 속에 음험하게 숨어있는 남성적 시선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충만한 자기성이 없으며, 타인 자의 낯섦을 결국 소비해버리는 현상학적 남성성이 없는, 그저 있음. 레비나스는 '일리아'라는 일상적 타자성을 통해 자기도취적 내면성을 지닌 서양적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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