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 저는 실제로 '비 온다'나 '어둡다'와 같이 '그저 있음'의 비인칭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쁨도 풍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소음에 대한 모든 부정 이후에 되돌아오는 소음입니다. 무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지요. 저는 가끔 배제되는 제삼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지속되는 이러한 '그저 있음'에 대해서, 그것을 존재 사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그것을 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이 공포스러운 것을 기술하려는 시도이며, 더 나아가 그런 것을 공포와 공황으로 기술합니다.
네모 : 잠자리에 누워서 밤이 지속됨을 느끼는 어린아이가 공포를 경험한다는 것은...
레비나스 : 불면 중에, 잠들지 못한 '나'가 있다고 혹자는 말할 수 있고 또 혹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의 불가능성은 나의 주도권과는 무관한 어떤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 비인칭성이 나의 의식을 흡수합니다. 말하자면 그 의식은 탈인칭화 됩니다. 내가 밤을 새우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가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죽음은 '음악이 끝나는'(그런데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절대적 부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저 있음이라는 불안하게 만드는 경험에서, 우리는 그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음악을 멈추게'하지 못하는 총체적 불가능성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1.
'비 온다, 어둡다'와 같은 '그저 있음'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진 기와 조각과 조약돌, 마 3근'의 내재성 같은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리아이며, 관념적인 곳에 있음이 아니다. '저곳'의 초재성을 상정하면 중심이 형성되고, 관조하는 주체와 대상의 위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초월의 가능성 아닌, 울타리를 공유하는 전체성은 결국 중심으로 포획되고 만다.
환원할 수 없는 신비, 환대를 위한 해체, 전언철회적 그라마톨로지는 각자의 강도를 가지는 개방된 전체성을 향한다. 초재성은 각자의 신비가 교통하는 장소 없는 장소일 뿐이다. 정처 없음의 리추얼적 장소에 비로소 아름다움이 머문다. 그곳은 항상 되어가는 곳, 유목적인 장소로 고정될 수 없는 비장소성을 가진다. 지배 없는 초재성에 머물지 못하는 전체성은 삶의 정처 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더욱 확고한 것을 잡으려 하지만, 붙잡으려 할수록 미끄러질 뿐이다.
2.
어떤 목적론, 주체성의 의지로 환원되는 것 없이 비어있는 장소.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 'Deus 없음'의 도래. 갑자기 끝나버리는 블랑쇼 글쓰기의 지점. 어느 순간 아파트가 무너져내리는 비실제. 그 미답의 장소에서 시작된 어떤 주체성 없는 내재성의 강도.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나버린 무에 거주하는 어떤 것이다. 저 무한한 별빛까지 다가갔다가, 깨진 기와 조각과 매화꽃 한 송이로 돌아오는 일과 관련된 일이다. 이러한 리추얼적 장소를 레비나스의 일리아라고 할 수 있다.
3.
불면이 의식을 흡수한다는 것은 죽음의 비인칭성과 관련한다. 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불면의 사태는 정처 없는 비의식이며, 잠 없는 잠의 도래, 의식이 끝나버린 어딘가 거주하는 것이다.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끝나버린, 그곳으로 도래한 죽음은 총체적 불가능으로 감각된다. 어떤 기투도 불가능하고, 서늘하게 비인칭화되는 죽어감.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무화되는 존재의 비존재 사건. 일리아가 공포스럽고 공황적인 어떤 것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