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사이를-벗어난 관계

윤리와 무한 읽기(15),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10일

by 김요섭



네모 : 그러면 선생님이 제안한 해결책은 무엇이었나요?


레비나스 : 저의 첫 번째 생각은 아마 어떤 '존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 속에서 두렵게 하는 '그저 있음'을 다스리는 것에 해당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있음'의 공포 속을 비추는 여명과도 같은,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사물들이 스스로에게 드러나는 순간, 사물들이 '그저 있음'으로 인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음'을 지배하는 순간과도 같은, 규정된 존재자 내지 현존재에 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저 탁자가 있다, 사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우리는 존재자에 존재를 연결하고, 자기가 소유하는 존재자들을 이미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저는 존재자들의 '홀로서기'에 대해서, 즉 존재로부터 무언가로의 이행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는 자리를 잡게 되는 존재가 '구해진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생각은 첫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자기 자신은 자신이 지배하는 이 모든 존재자들로 혼잡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염려'의 형태가 존재의 혼잡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움직임입니다. '그저 있음'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자리 잡는 게 아니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에 의해 주권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존재-사이를-벗어난(사심 없는) 관계입니다. 저는 이 말(사심 없음)이 뜻하는바, 존재 사이를 벗어남을 강조하고자 세 단어로 썼습니다. 저는 남용되어 그 가치를 상실한 '사랑'이라는 말을 불신합니다. 타인에 대한 책임, 타인을-위한-존재는 그 당시 제게 익명적이고 무분별한 살랑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저 있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저에게 나타났던 것은 이러한 관계의 형태 속에서였습니다.



1.

대상화하는 존재자로부터 존재를 구해내는 일이 레비나스의 '홀로서기'이다. 그것은 폭력적 주권의 자리에서 물러남이며, 존재의 본래성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홀로서기로 가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불안과 염려하며 사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존재의 가능성과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은 대상화할 수 없는 불안으로 출몰한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두려움과 달리, 고정점을 찾을 수 없는 혼잡함이며, 정처 없는 '염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죽음을 향한 시간에서 기입되는 불안, 염려를 대리 보충으로 잊으려 하기도 한다. 다른 존재자를 지배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 일시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라는 불사의 감정은 존재자를 향한 대상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지배와 착취를 통한 대리 보충으로 비존재로 가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존재자는 다른 존재로의 모든 초월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유한성에 갇히고 말 것이다.




2.

레비나스의 탈출은 존재가 무로 가는 시간을 다르게 만든다. '그저 있음'이라는 재앙으로부터의 탈출은, 타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비켜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로써 완고한 주체는 현상학적 여성성이자 '타인을-위한-존재'로 변해간다. 그것은 물러남이며, 사심 없는 관계이며, 남발된 언어로부터 존재를 구해내는 일이다.


타자를 환대하는 과정체는 재앙의 아름다움을 통해 구원의 순간에 이른다. '그저 있음'의 '공포스럽고 공황적인 것'이 관성적인 주체성을 흔들며 균열을 만든다. 아름다움의 순간, 재앙의 부정성은, 동시에 긍정성이며 모든 아이러니를 넘어선다. 주체와 타자라는 각각의 전체성은 비로소 합일하며 '존재-사이를-벗어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사심 없는 관계'는 전적인 환대의 가능성이며, 진정한 사랑으로 이행이자, 오직 당신을 지향하는 언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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