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17),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12일
네모 : '이 강연의 목적은 시간이 홀로 고립된 주체의 사건이 아니라 다름 아닌 주체와 타인의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이상한 시작 방식인데요. 왜냐하면 이 말에는 고독이 그 자체로 문제라는 가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 : 고독은 '실존주의적인' 주제였습니다. 그 당시 실존은 고독의 절망, 혹은 불안 속에서 고립으로 기술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나온 제 책이 '그저 있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의미하듯이, 이 책은 이러한 실존의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나타냅니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인식에 있어서 세계로 나가는 벗어남을 고찰합니다. 저의 노력은 지식이 실제로 내재성이라는 점과 지식에서 존재의 고립이 전복되는 일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지식의 소통에서 타인 곁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뿐이지, 타인과 마주하지 않으며, 타인의 면전에 올곧이 서지도 않습니다.
타인과 직접 관계를 맺는 존재는 타인을 주제화하지 않으며 인식된 대상을 고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고찰하지도 않으며, 타인에게 지식을 전달하지도 않습니다. 존재는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나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나의 존재를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고독은 여기서 다름 아닌 존재 사건의 흔적을 담은 고립으로 나타납니다. 사회적인 것은 존재론 저편에 있습니다.
1.
'인식에 있어서 세계로 나가는 벗어남을 고찰'한다는 의미는, 존재와 분리된 인식을 넘어서겠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의 사물이 자신의 머릿속의 범주와 맞아떨어질 때, 그것을 진리라고 해 왔던 남성 중심적 인식론과의 단절이다. 주체는 결코 자신의 선이해, 역사성 없이 거기 있을 수 없음에도, 시간도 공간도 포월하는 신적인 태도로 폭력을 행사해 온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만함은 결코 '타인과 마주하지 않으며, 타인의 면전에 올곧이 서지도' 못한다. 하물며 레비나스적 유책성에는 다가갈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원이 모든 것에 대해, 서로에 대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죄가 깊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절>
존재와 분리된 채, 인식하는 주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거기 있음'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장소성.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 앞에 나의 책임을 외면하는 인식론은, 존재 망각의 역사였을 뿐이다. 각자의 존재 지평에서 타자를 인식으로 환원함 없이 환대하는 레비나스의 지향성은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을 향한 열림이자, 존재 사건이다.
2.
인식론적 시간은 '홀로 고립된 주체의 사건'이 될 뿐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시간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성의 신비가 존재에 기입될 때, 실존은 내던져진 존재로서 고립되지 않는다. '그저 있음'의 공포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초월의 장소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이는 '인식에 있어서 세계로 나가는 벗어남'이며, 레비나스적 탈출이다.
이를 위해 존재는 고독 속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고독은 홀로 고립된 주체의 사건은 결코 아니다. 자아 속에 비자아로 머물러 있는, 타아와의 관계 맺음.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고독이다. '타자는 주체와 등기원적으로 생성되지만, 그 찰나의 시간에 먼저 물러나 있다'는 잃어버린 장소와 시간으로의 지향. 나보다 더 나였으나, 너무도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일그러진 타아의 얼굴 앞에 서는 것. 그러나, 이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호기심, 잡담, 애매성의 일상성으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하는 정의, 모든 아이러니를 품는 사랑. 그 열림을 지향하는 내재성의 강도가 타자의 도래를 예비한다. 이는 '말할 수는 있으나, 공유될 수 없는' 비의식 앞에 서는 일이며, '존재 사건을 담은 고립'이다. 그는 비로소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고독의 시간으로 물러나며, 그분과 함께 홀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