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18),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13일
네모 : 선생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다. 존재하는 것들, 사물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는 이것들과 관계를 유지한다. 시각, 촉각, 공감, 공동 작업 등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함께 존재한다. 이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다. 나는 대상을 만지고, 타자를 본다. 하지만 나는 타자가 아니다.
레비나스 : 여기서 공식화되는 것은 고독에서 벗어날 가능성으로서의 이 '함께'를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존재를 공유하는 것을 나타낼까요? 어떻게 하면 이 공유가 현실화될까요? 아니면(공유라는 말은 존재가 소유의 질서에 속한다는 의미일 수 있기에) 우리를 고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로의 참여라는 게 있을까요?
네모 : 우리가 가진 것은 공유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은 나눌 수 없다는 말인지요?
레비나스 : 하이데거에게도 마찬가지로, 존재의 근본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과의 관계입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기 홀로 죽는다는 것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규탄받습니다.
1.
장 뤽 낭시의 '공동-내-존재'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움직임을 나타낼 수 없는 타동사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공동체를 통해 개별자가 드러난다. 공동체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는 낭시적 존재론은 각자의 단독성이 공동성에 의해 억압당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동-내-존재'는 지배하는 전체성에 포획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 없는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단독성이 드러나는 사건에 가깝다. 이는 고립된 주체가 타자로의 초월을 통해, 다시 자신의 고유성으로 현현함을 의미한다. 고착된 명사형의 존재가 아닌, 되어가는 열림을 만들어 내는 일은 자신의 나르시스적 거울보기로는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낭시의 '공동-내-존재'는 동일자의 얼굴이 아닌, 타자의 얼굴을 통해 도래하는 진리 사건이며, 아름다움의 구원인 것이다.
2.
'공동-내-존재'가 아닌, 던져진 존재는 기분 잡혀 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엄습하는 그것은 고립된 존재자로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거기 있음'의 유한성에 조건 지어진, 죽음을 향한 직선의 시간성은 현존재를 짓누른다. 불안은 그의 그림자이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는 타인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 있음'은 자신의 존재의 위치가 아닌 다른 장소를 향해 눈을 돌리게 한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그의 불안은 현존재로서 '거기에 있는' 다른 존재자를 향한다. 결국 그의 '마음씀'은 '함께 거기에 있음'을 열어주며, 이는 '심려'를 통해 서로 결속할 수 있게 한다. 비로소 고립된 이에게 타자의 존재 가능성이 열리며, 그는 더불어 있을 수 있게 된다.
3.
낭시의 '공동-내-존재'와 하이데거의 '현존재, 심려, 함께 거기에 있음'은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만난다. '시각, 촉각, 공감, 공동 작업 등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함께 존재'한다는 그의 말은 낭시와 하이데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고립된 주관성이 만나는 타자의 얼굴이며, 자신의 얼굴에 비친 불안과 타자의 불안은 함께 염려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로써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슬픔인, 불안은 타자의 얼굴이라는 초월적 사건을 통해, 함께 애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뀐다. 이러한 무위의 공동체만이 '나눌 수 없는 것을 공유하며, 공유할 수 없는 것을 나눌 수 있다.' 이는 되어가는 공동체로서 곡선의 시간성을 살아감이며, 불가능의 가능성에 다가서는 일이다. 오직 그 '장소 없는 장소'에서, 현존재는 '거기 있고' 동시에 '함께-거기에-있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