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 선생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완전히 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의 존재,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존재함은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요소, 즉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을 구성한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존재들 사이의 어떤 것이든 교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모나드이다. 내가 문도 없이 창문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내 안에 소통할 수 없는 어떤 내용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일 내 안에 소통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내 존재 안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 안에서 가장 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의식의 확장, 내 표현 수단의 확장은 어떤 것이든 나와 존재함의 관계에, 전형적인 내면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레비나스 : 그러나 고독이 그 자체로 이러한 반성의 주요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존재의 표시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존재로부터 벗어남에 관한 문제입니다.
1.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존재를 사유할 수밖에 없다. 탄생이라는 유한성의 이벤트는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시간의 쇠사슬을 현존재의 발목에 채워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절대적 폭력이자, 어떠한 방법으로도 넘을 수 없는 무의 시간으로 기입되는 시간성 앞에 우리는 처해있다.
'무한자'는 존재를 홀로 서게 한다. '존재함은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요소, 즉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을 구성'한다는 레비나스의 문장은 '죽음의 각자성'과 관련한다. 어떤 죽음도 대신해서 죽을 수 없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자동사적 성질이 '죽음'인 것이다.
타자의 죽음은 애도할 수 있으나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초험적인 것이며, 단 한번 경험과 동시에 사라지기에 공유될 수 없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존재들 사이의 어떤 것이든 교환할 수 있다.'는 말도 죽음은 나눠질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존재는 무한 앞에 '완전히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각자성'의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2.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모나드이다.' 나눌 수 없고 공유될 수 없는 모나드는 레비나스에게 존재의 기획 투사, 재구성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안에 소통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내 존재 안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각자의 단독성은 그가 자신의 의지나 힘으로도 달성 가능한 지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 속의 '대타자'와 관계 속에서 계시받은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다. 오직 그에게만 주어진 계시는 그가 받드는 과업이며, 함께하는 기투이다. '내 안에 소통할 수 없는 내용'은 계시받은 단독성이기에,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다. 다만 기다리고,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하는, 사랑일 뿐이다. 그것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청하는 일이며, 동시에 만류하는 삼감이자, 오직 그곳을 향한 지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