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 그렇다면 첫 번째 해결책은 인식에서, 그리고 선생님이 '먹거리'라고 부르는 것에서 세계와의 관계를 구성하는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레비나스 : 저는 이 땅의 모든 먹거리를 주체가 자신의 고독을 회피하기 위한 향유로 이해합니다. '고독을 회피한다'는 표현 자체가 이렇게 자기로부터 벗어남에 환영적이고 순전히 허울뿐인 성격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인식에 관한 한, 그것은 본질상 우리가 동등시하고 포괄한 것, 우리가 타자성을 유보한 것, 내재적이 된 것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척도와 나의 눈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기토가 스스로에게 땅과 하늘을 줄 수 있다고 말한 데카르트에 대해 생각합니다. 코기토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무한의 관념입니다. 앎은 언제나 사유와 사유 대상의 일치입니다. 결국 인식으로는 자기로부터의 벗어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식과 동일한 구조를 지닐 수 없습니다.
1.
'타자성(사회성)은 인식과 동일한 구조를 지닐 수 없다.' 무엇이든 이성의 재판 아래 세울 수 있다는 인식적 환원이 주체의 속성이다. 인식의 논리로는 레비나스의 유책성은 부당하며 도저히 수용 불가능할 것이다. 그의 미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전원이 모든 것에 대해, 서로에 대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죄가 깊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절>
'우리 전원이 그 사건에 대해 죄가 있다면, 각자의 경중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죄가 깊은 사람을 먼저 고발해야 합니다.'
2.
생성의 순간 타자는 주체가 머물 수 있도록 먼저 자리를 물러나 인식의 빛 너머로 사라진다. 주체는 그곳에 거주함으로 내면성이 만들어지는데 인식은 그의 전체성의 형식을 만든다. 하나의 전체는, 성간 존재인 다른 전체성이자 타인과는 울타리를 공유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전쟁'이라는 합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관계하게 된다. 최초의 살해자로서 카인이 자신의 동생을 죽인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인류의 근원적 욕망에 '죽음 충동'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 폭력도 허용하는 전체성은 동일자의 욕망이며, 완고한 인식이자, 죽음을 향한 존재의 왜곡된 불안이다.
3.
타자가 없다면 주체는 동일자로 머무르게 된다. 자기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유한성은 존재의 허기를 불러온다. 그의 헛헛함은 주거함으로 시작된 내면성과 바깥의 불일치, 그로 인해 고착된 정주성과 관계한다. 그러나 '세계-내-존재'로서 거기에 있는, 자신의 시간성과 장소의 인식이 없는 주체는 스스로 유폐된다. 타인 자로부터 '먹거리'를 섭취하며 '고독을 회피'하는 감각으로는 관성적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그의 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먹거리'는 밖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주체성의 발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영'과 같은 허위의식으로 모든 것을 향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자기 인식을 갖는다.
무엇이든 이성의 재판장에 세울 수 있다는 코기토의 오만은, 타자가 들어올 수 있는 어떠한 장소도 마련해 줄 수 없다. 오직 '나의 척도, 나의 눈금'의 계산하는 주체는 유한성 너머, '무한'을 모른다. 최초의 순간, 그도 모르는 몫까지를 선물하고 물러난, 환대하는 타자를 결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