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21),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16일
네모 : 여기에는 어떤 역설적인 것이 있습니다. 보통의 의식에는 반대로, 앎은 대체로 그 정의상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설령 선생님께서 별들에 관한 인식에 대해서, 까마득히 먼 것에 관한 인식에 대해 그렇게 주장하시더라도, 우리가 '동일자'의 요소 안에 머무른다는 말인가요?
레비나스 : 인식은 언제나 동화 작용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가장 놀라운 발견들도 '이해' 속에서 '취한' 것이 있더라도 결국 흡수되고 포함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가장 대담하면서도 멀리 떨어진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정녕 타자와 교감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성을 대신하지 못하며, 여전히 늘 고독입니다.
네모 : 선생님은 이렇게 인식을 빛으로 여기면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명(eclaire)되는 것은 소유됩니다.
레비나스 : 또는 소유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까지도 말입니다.
1.
'의식은 자신을 속인다'
자아는 단일한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물러나 있는 비의식이자 비존재와의 관계가 자신이며, 동시에 확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되어가는 존재'의 핵심적 지점이 타자성과의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존재적인 것은 주체가 언어로 포획하려 하면 할수록, 물러나며 더욱 멀어져 갈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멀어져 가는 성간 천체를 바라만 볼뿐, 어루만지지 못한다.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매력을 잃어버린 그의 시선은 어느새 땅을 향한다.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의 단단함을 감각할 뿐이다. 탄생의 순간 먼저 물러난 타자로 인해 비로소 거주할 수 있었던 존재 사건은 그의 기억에서 소거되었다. 자신의 내면이 형성될 수 있었던 타자의 환대를 깜깜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아가 아닌 비존재, 타아와 '함께' 자신일 수 있었던 주체는 모든 신비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안온한 정주를 선택했다. 더 이상 주체에게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은 도래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식의 빛이 그토록 원했던 확실성은 비확실성과의 분리로 불확실해질 뿐이다. 어떠한 고정점도 찾지 못한 자아는 정주하고 있으나, 거주하지 못한다. 리추얼적 신비를 상실한 그는 정처 없이 떠돌 뿐이다.
2.
실존과 신비는 분리되었다. 주체는 안전하게 집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했으나, 그의 내면에 끔찍한 존재의 허기가 수시로 밀려온다. 카오스적 혼돈은 자아 속 어딘가, 장소 없는 장소에 도래해 있던 비존재의 부재로 인함이다.
빛, 명증성, 해명을 요구하는 후설적 주체로부터, 비의식은 물러나고 멀어져 갈 뿐이다. 타자는 이제 전적으로 부재한다. 역설적이게도 비어있을 뿐이라 생각했던 장소가 없음으로 인해 주체는 인식의 대지를 밟고 서지 못한다. '해명'은 오직 비해명되는 것 속에 있다는 진실을 여전히 그는 알지 못하기에.
역설적이게도 그의 주체성은 비주체로 인해 무너져 내린다. 어떤 의식도, 기원도 찾을 수 없는 존재는 부유할 뿐이다. 메마른 인식의 황야를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어느 순간 하늘을 올려다본다. 쏟아져 내릴 듯 별이 반짝이지만 안타깝게도 소유 없이 어루만지지는 법을 잊었다. 신비를 애무하는 일을 망실한 채, 눈을 껌뻑거린다. 사방은 캄캄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주체의 인식의 빛으로는 한치도 밝힐 수 없는 어두운 광야만이 펼쳐져 있다. 황망한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어떤 확실성 없는 확실한 고립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