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22),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17일
네모 : 차이에 의해 고독에서 벗어남은 소유의 상실이나 취한 것을 버리는 것이 된다는 말인지요?
레비나스 : 사회성은 인식을 통한 것이 아닌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저에게 나타난 시간은 존재의 확장으로 이해된 시간입니다. 그 책은 무엇보다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향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몇몇 구조를 보여 주었습니다. 지향성이 바로 정신의 정신성을 나타낸다고 한 후설의 생각을 의문시한 것이죠. 그리고 그 책은 다음과 같은 관계에서 시간의 역할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시간은 지속에 대한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가 소유한 것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끄는 역동이다.' 마치 시간 속에 우리와 동등한 것을 넘어서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도달할 수 없는 타자성과의 관계로서의 시간, 따라서 규칙적인 흐름과 그 반복의 중단으로서의 시간.
[시간과 타자]에서 이 논지를 뒷받침한 이 두 가지 주요한 분석은 한편으로 여성적인 것의 타자성과의 -혼동 없는- 에로스적인 관계를 다루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로부터,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다른 한 타자로 나아가는 부성의 관계를 다룹니다.
말하자면 시간성은 번식성의 구체성이자 논리적 역설에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동일자가 타자를 지배하거나 흡수하거나 병합해 버리는 것과 대조되는, 지식을 그 모형으로 삼는 것과 대조되는 타자성과의 관계입니다.
1.
만류이자 간청이며, 전언철회의 아름다움은 '자식성'과 관계한다.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다른 한 타자로 나아가는 부성'은 차연(差延)이며, 에로스의 형식이다.
자기 동일성과 차이로서 두 전체성의 우발적 마주침. 굳게 닫힌 경계의 찰나의 균열. 그곳을 향한 극단을 허용하는 열정. 불가능한 합일의 순간, 사라져 가는 아름다움. 그 장소 없는 장소에서 '자식성'은 잉태되는 것이다. 이는 유한성의 경계에서 타자성을 통한 초월이며, 에로스 안에서 내어줌과 물러남이 생성하는 탁월한 환대이다.
'자식성'은 자신이 아닌 방식으로 지속되는 소유 없는 소유의 형태이자 곡선의 시간으로 탈주하는 일이다. 비로소 우발성에서 필연성을 획득한 에로스는 주체성으로 다시 회수될 수 없고, 지배할 수도 없는 '절대적으로 다른 타자성'이 되었다. 마주침과 탁월한 열림은 주체에게 그도 모르는 존재 사건을 선물했다. 이는 후설의 정신적 지향이 알지 못하는 시간이다. '거기 있음'을 어루만지는 애무이자, 환원 없는 소유이며, 탈출인 것이다.
2.
장 뤽 낭시는 '정의'를 그에게 그도 모르는 몫까지 주는 것이라 했다. 이는 단 한 번도 행해지지 않은 것을 지시하는 언설이며, 환대하는 타자성이다. 낭시적 사랑은 레비나스의 '자식성'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곡진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위해 '유책성'이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가 나서서 '내가 먼저 벌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책임성으로 인한 시차. 형식적 평등, 법리적 공정이 아닌, 유책성을 우선적으로 인수하는 사건으로의 서사. 그 '지연'에서 발생하는 장소에 '에로스'는 비로소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대와의 거리, 시간성, 차이에서 생성하는 에로스는 포르노그라피적 아펙툼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연(差延)의 서사에 후설적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사랑은 흘러든다. 대상화하는 인식으로 분리되었던 본래적 실존이 비로소 존재와 합일하는 순간은 도래하며, 타자성은 이 순간 물러나 있거나, 달아남 없이 '거기 있을 수 있다'
거기 있음의 바깥을 향하는 곡예는 아름다움의 구원의 순간이다. 자신이 하지 않은 잘못마저도 감싸안는 사랑이며, 기피할 수 없는 소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