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 알지-못함은 여기서 인식의 결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견할 수 없음은 인식에만 관계되는 타자성의 형태입니다. 인식에 있어서 타자는 본질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로스에서 타자성은 예견할 수 없음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사랑이 사랑임을 아는 데 실패한 것과 같지 않습니다.
네모 : [시간과 타자] 중 사랑의 관계에 할애된 장에서 몇 줄을 꼽아 보겠습니다. 성의 차이는 상보적인 두 항의 이원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보적인 두 항은 그것에 앞서 존재하는 전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의 이원성이 전체를 전제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전에 사랑을 융합으로 상정해 놓은 것이다. 반면 사랑의 파토스는 존재들이 넘어설 수 없는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영원히 달아나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바로 그러한 사실로 인해 타자성을 중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성을 보존한다.
여기서 타자로서의 타자는 우리의 것이 되거나 우리가 되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타자는 그 신비 속으로 물러난다. 이 여성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빛에서 달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진 그것의 존재 방식이다. 존재 안에서 여성적인 것은 빛을 향해 가는 공간적 초월 사건이나 표현 사건과는 다른 어떤 사건이다. 그것은 빛 앞에서의 도피다. 여성적인 것이 존재하는 방식은 자신을 감추는 것, 혹은 부끄러움이다. 그러므로 여성적인 것의 타자성은 단순히 대상의 외재성에 있지 않다. 또한 의지의 대립으로 형성되지도 않는다.
1.
'알지-못함'이 사랑하지 못함은 아니다. 현전의 형이상학은 '비일상성의 헤테로토피아, 부재하는 비인칭적 있음'을 모른다. 그녀의 '알지-못함'은 '거기 있음'과 분리된 지식의 불능이다. 인식의 칼이 살해한 존재의 시간과 장소, 역사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앎이 간과한 비존재로서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2.
에로스는 시차와 거리를 통해 발생하는 다름의 사랑이다. 현존재가 빠져있는 동일성은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나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 것이다. '멀리서 오는 자'는 '성급한 이웃사랑'의 즉발적 열정으로는 환대하지 못한다. 그는 사랑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자기 연민에 허기져 있을 뿐이다. 이웃을 향해 달려가는 조급한 발걸음은 자신을 잊으려는 발버둥이며, 타인을 향한 미소 역시 '피 흐르는 셀카의 뒷면(한병철)'이다.
이웃 사랑을 흉내 내는 주체는 자기 동일성으로 대상을 포획한다. 조급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타자의 '외재성'을 보존하기는커녕 단일성으로 환원하려 할 뿐이다. 이는 파편적인 일부를 '절대지'로 포장하는 성급함이다.
그러나 사랑 안에 있는 주체는 기다린다. 인식으로 환원하는 계산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 그의 선이해는 단절되고, 판단은 중지될 뿐이다. '의지의 대립'에 무지함으로 인해 그는 비로소 극단까지 나아가는 모험에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이는 몰이해나 자기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계시받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랑이며, 자기 확신 없는 확실성에 머무는 일이다. 바깥에서 온 우발적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존재 사건인 것이다.
3.
신비를 환대함 속에서 타자성은 살해되지 않는다. 사랑의 가능성은 이성의 빛으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대립항에 있지 않다. 또한 인식의 바깥에 단순히 외재하는 것도 아니다. 빅뱅의 순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서 물질성을 선물하고 사라진 타자성.
계속해서 물러나고, 감추면서 존재하는 '부끄러움'은 단순히 주체의 능동성에 대비되는 수동성이자 비생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가 자신의 것이라 믿는 능동성의 '기원 없는 기원'이며, 가능성의 '장소 없는 장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하지 않는 삼감, 존재의 바깥, 무한과 맞닿는 환대. 유책성을 먼저 인수한 타자성은 무엇보다 앞선 것이며, 에로스가 가능하게 한 시차, 그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