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

윤리와 무한 읽기(25),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0일

by 김요섭



네모 : [시간과 타자] (계속 인용) 여성적인 것의 초월은 다른 어딘가로 달아나는 데 있다. 의식의 운동과는 정반대 방향의 운동이다. 하지만 이런 점 때문에 여성적인 것이 무의식적이거나 전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이를 신비라고 부르는 것 말고 달리 표현할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을 자유로 상정하기에, 빛의 측면에서 생각하기에, 의사소통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거머쥐거나 소유하려는 경향의 운동이 실패했다는 점만 인정해 왔다. 우리는 에로스가 어떤 식으로 소유 및 권력과 구별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만, 에로스 안에서의 의사소통을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은 투쟁도 아니고, 융합도 아니며, 인식도 아니다. 우리는 관계들 가운데서 에로스의 예외적인 위치를 식별해야 한다. 그것은 타자성과의 관계이고, 신비와의 관계이며, 다시 말해 미래와의 관계이고, 모든 것이 있는 세계 속에서 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이다.


레비나스 : 아시다시피, 이 마지막 명제는 시간과 타자를 동시에 생각하는 일의 관심사를 입증합니다. 아마 한편으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간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이 모든 암시는, 인간성을 두 가지 종(또는 두 가지 유)으로 나누는 대신, 남성적인 것에, 여성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이 모든 인간 존재의 속성이라고 표현했더라면, 시대에 덜 뒤떨어져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수께끼 같은 창세기 1장 27절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요? '신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1.

'타인을 자유로 생각하는' 주체는 신비를 모른다. 그가 상정하는 타자성은 자신의 인식의 틀로 포획될 수도,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말할 뿐이다. 항상 주체성의 중심에서 시작되는 인식의 빛은 타인과는 상관없이 파악하고, 계산하며, 분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타인이 자신과 마주 했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그의 시선이나 상상으로 감각되는 이미지도 얼마든지 인식론적 환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빛의 측면에서 생각되는' 타인 자는 주체의 구심력으로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다. 결국 타자는 고유의 시차와 거리를 잃고, 그의 위계로 복속된다. 이런 논리라면 앞서 레비나스의 말을 '타인을 자유로 상정하지 않음'이라고 고쳐 써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식론에서 주체와 대상은 어떤 방법적 차이를 강구하더라도 분리를 피할 길이 없다. 타인은 코기토의 대상이며 비동일성이기에 나와 분리된 각자이며, 이러한 결과 '자유로 상정'되는 것이다.



2.

여기서 더 살펴볼 지점이 있다. 앞서 사유에서 빠진 부분은, 타인 역시 '주체'이며 자신의 중심에서 인식한다는 점이다. 주체들의 동심원적 위계는 충돌하기 마련이며, 각자의 위상은 서로에게 맞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타인을 자유로 생각함'은 그들이 많은 말을 쏟아내는 순간에도 '의사소통의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주체성은 양지바른 곳을 선점하려 할 뿐, 물러남을 모른다. 유책성을 먼저 인수하며 환대하는 타자성과 달리, 그들은 이 방에서 죄가 더 많은 이를 고발할 뿐이다. 상대의 책임회피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동일성은 칼을 꺼내 든다. 비동일성이자 동시에 동일자인 이들의 '전쟁'은 내적 필연일 수밖에 없다.


'같지 않음'을 향한 그의 증오는 타인을 이해할 어떤 수단도 찾지 못한다. 울타리를 공유하는 하나의 전체성으로 상호성은 다르지 않음을 지향한다. 마침내 울타리 넘어, 상대를 죽임으로 동화시킨다. 피를 뒤집어쓴 그의 몸은 여전히 씩씩댄다. 시간이 흘러도 증오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쓰러진 시체를 내려다보는 자신의 시선에 무엇인가 빠져있음이 느껴질 뿐이다. 해소되지 않는 어떤 것이 여전히 괴롭힌다. 자신이 죽인 것이 절대적 타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자신을 살해했다는 진실에 닿을 수 없는 그는, 안타깝게도 또 다른 비동일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3.

순수성을 확보했다고 믿는 단일한 전체성은 자신을 살해했을 뿐이다. 비동일성과 동일성은 '다르지 않음'이자 거울로 보는 자신의 양면일 뿐이다. 그들 사이의 어떤 차이나 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동일한 전체성에서 시작되는 '대화 불능'은 '에로스'의 생성을 가로막을 뿐이다.


유책성을 먼저 인수하려는 레비나스적 주체성과 물러나 있는 타자와의 시차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이 시간차는 '신비와의 관계이며, 다시 말해 미래와의 관계'이다. 그 불균형, 불평등, 비균일성의 부정성만이 진짜 긍정을 생성할 수 있다. 절대적 다름의 차이 속에서 비로소 에로스는 생성되는 것이다.


환대는 동질성의 요구가 아닌, 비동일성의 제거도 아닌, 차연(差延) 속에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신비를 모르는 주체는 부정성에 머무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있는 세계 속에서 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가 망실된 그는 신비를 모른다. 결국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말고는 어떤 가능성도 남지 않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살해를 차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구제불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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