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내용 없는 기다림, 망각

윤리와 무한 읽기(26),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1일

by 김요섭



네모 : 선생님은 성적 쾌감에 대한 분석으로 글을 이어 가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애무되는 것은 만져지는 것이 아니다. 애무가 추구하는 것은 이렇게 접촉으로 주어진 손의 부드러움이나 포근함이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통해 그 본질을 구성한다. 이러한 '모른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질서 잡혀 있지 않음이 그 본질이다.


애무는 마치 달아나는 어떤 것과 하는 놀이, 구상이나 계획이 전혀 없이 하는 놀이와 같다. 우리의 것이나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무언가와 하는 놀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와, 언제나 다르며 언제나 접근할 수 없고 언제나 미래에서 도래하는 것과의 놀이 말이다. 그리고 애무는 아무 내용 없는 이 순수한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다."

인식의 관계가 아닌, 존재로부터 벗어남을 진정으로 현실화하는, 타인과의 관계의 두 번째 유형이 있는데, 이 자체에 시간의 차원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성입니다.


레비나스 : 자식성은 훨씬 더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타자가 철저히 타자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나인 타자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인 자식은 소유물이 되지 않은 그의 것인 타자성과 관련됩니다.




1.

레비나스의 '애무'는 기다림이며, 망각이다. '손의 부드러움이나 포근함이 아닌' 만져짐은 현존재의 '빠져있음'의 확실성과 다르다. 그것은 연인의 들뜬 육체의 열감이 아닌, 멀리서 오는 사랑의 흩어짐이다. 연약한 예지 속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확실성이자, 바깥을 향해 어루만지는 유리창의 서늘한 감촉이다.


애무는 비어있는 장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해 있는 '어떤 있음'의 흔적을 향한다. 그것은 존재의 어둠 사이로 작은 빛이 도래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적 감각 같은 것이다. 만질 수 없는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쓸쓸함이며, 타고 남은 재를 뒤적이는 황량함이기도 하다. 그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기다리다가 먼저 죽을지도 모를, '정처 없음'이다.



2.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하는 주체성은 미래에 산다. 비존재 속의 현존재는 확실함 없는 확실성의 미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주체는 기다리며 망각하고, 의지하며 포기하고, 손을 내밀며 감춘다. 이는 타자성의 물러남이며, 양지바른 곳을 서둘러 포기하는 일이며, 내가 먼저 감내하겠다는 유책성의 인수이다.


레비나스의 애무는 여전히 낯선 돈키호테의 정열이다. 그것은 불가능의 형식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용기이다. 존재가 떠나버린 세계, 숫자로 환원되는 말인들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에게 갑자기 온 것과의 관계이다. 신성(神聖)과의 통신이 두절된 시대에 도래한 계시의 뜬금없음이며, 동시에 다 알지 못한 채로 그것을 받드는 서늘함이다.


이는 어떤 충만함과 넘쳐흐르는 포만감도 없는, 차가운 열정에 가깝다.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없는 부정성에 홀로 머무는 일이다. 모든 불가능에도 단 하나의 촛불을 반복해서 켜는 지독한 무용. '계속해야 한다'는 미래 속의 의지만이 지속하며, 그분의 얼굴은 비로소 예감되는 것이다.



3.

'다른 무언가와, 언제나 다르며'는 후설과 차이나는, 레비나스의 두 개의 전체성이다. 그것은 결코 인식의 빛으로 비춰지지 않으며, 해명되지도 않고, 분명히 밝혀지지도 않는 '신비'이다. 그것은 '언제나 접근할 수 없고 언제나 미래에서 도래하는 것과의 놀이'일 수밖에 없다.


기다림은 미래와의 관계이다. 지속하는 존재가 계시를 받든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시간을 사는 일은 한계가 있다. 세계-내에서 시작은 그 즉시, 끝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타자성을 환대하는 일로 은유되는 사건이 바로 '자식성'이다. '철저히 타자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나인 타자와의 관계'는 계시받은 단독성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지속의 무한성은 자식과의 관계이자 소타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결코 거기 있지 않은 것과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