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것의 저편, 복수적 단수

윤리와 무한 읽기(27),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2일

by 김요섭



네모 : 선생님은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나타낸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의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가요?


레비나스 : 저는 언젠가 장 발의 학교에서 자식성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나의 존재가 생산성 속에서 -아이들의 가능성에서 시작하여- 어떤 존재의 본질에 새겨진 가능성들을 넘어서는 것처럼. [가능한 것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말이죠. 저는 한편으로 존재론적 조건의 전복과 또한 실체의 논리의 전복을, 다른 한편으론 초월적 주체성의 전복 -이것이 의미하는 바- 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네모 : 선생님은 이 안에서 순전히 심리학적인 '우연적 사건'이나 혹시 생물학의 술수가 아닌, 정확히 존재론적인 특색을 보십니까?


레비나스 : 저는 심리학적인 '우연적 사건'이 존재론적 관계가 스스로를 보여 주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심리학은 의외의 사건이 아닙니다.

타자의 가능성을 당신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본다는 사실, 당신에게 부여되지 않았지만 당신의 것인 무언가를 향해 당신에게 부여된 것과 당신의 동일성의 울타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 이것이 부성입니다.


나의 고유한 존재 저편에 있는 이러한 미래, 시간을 구성하는 이러한 차원은 부성에서 한 가지 구체적인 내용을 갖습니다. 아이가 없는 이들이 이러한 사실에서 어떤 식으로도 경시되지 말아야 합니다. 생물학적 자식성은 단지 자식성의 일차적 형태일 뿐입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혈연관계 없이도 자식성을 인간 존재들 사이의 한 관계로 매우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타인을 아들로 간주한다는 것은 바로 제가 "가능한 것의 저편"이라고 부르는 관계를 타인과 더불어 수립하는 것입니다.




1.

존재적으로 가장 먼 것은, 존재론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다. '타인을 아들로 간주한다는 것'은 혈연관계 없는 자식성이자 '가장 먼 것의 가까움'이다. 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식의 윤리적 요청이 아니다. 그보다 앞선 전기원적 윤리로서 파토스이다.

'거친 직결성'으로 남성성을 '꾸밈'이라는 여성성이 끌어안는, 곡선적 에로스이다. 가장 먼 것이자 가까움의 동시성은 윤리적 요청 이전에 욕망인 것이다. 유책성의 시차와 연결된 사랑만이, 전체성이 서로를 살해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이는 윤리보다 앞서며 무엇보다 시원적인 것이다.



2.

에로스는 차연이며, 합일이다. 윤리이자 전기원적 욕망은 '무위의 공동체성'으로 연결된다. 계속 멀어지는 우주에서 성간 천체의 충돌은, 서로의 궤도를 넘어서는 존재 사건이다. 우발적인 마주침은 각자성을 넘는 자식성으로 이어지며, 이는 '타자 안에 있는 주체성'이 서로 내어줌과 물러남의 에로스적 순간에 육체성을 입는 결실인 것이다. 비로소 '존재에서 존재자'로 이행하는 새로운 타자성은 또 다른 주체성을 탄생시킨다.


자식성임에도 혈연 없이 이어지는 형태가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무위의 공동체는 자식을 환대하는 부성의 형태를 띤다. 그들은 단지 '심리학적 우연'이자, 우발적 마주침일 뿐인 만남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인다. 혈연 관계 없는 자식성을 유한성의 틀을 넘어서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여긴다.

이러한 '공동-내-존재'로서 주체는 타자를 다른 전체성이자 언제든 '전쟁' 상태로 돌입할 수 있는 불가능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은, 계시받지 않는 단독성을 끌어안는다. 타자의 고유성과 단독성이 계속 거기 있을 수 있도록 지키는 유책성인 것이다.


이는 존재가 떠난 시대, 어떠한 신성도 찾기 힘든 사회에서, 마지막 남은 돈키호테로 사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사도가 '초월적 주체성'이나 '존재론적 전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먼저 양지바른 곳의 청구권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일이다. 자식의 잘됨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혈연 관계 없는 타인의 잘됨을 자신의 욕망으로 여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3.

이로써 유한성에 피투된 존재가 결코 넘을 수 없는 불안은 '지연'될 수 있다. 그 시차로 인해 부성이자 자식성의 '에로스'는 지속한다. 어둠 속 존재자들 사이의 작은 빛을 기다리며, 계속하는 일은 비로소 결실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계는 아프고, 상처받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알지 못함까지도 감싸안는 환대인 것이다.


그들이 끝까지 서로 알지 못함은 환원 불가한 타자성이다. 계속해서 달아나는 성간 천체의 신비이다. 이 '알 수 없음'과 연대하는 주체성은 복수적 단수로 산다. 서로가 울타리를 공유하지도 않고, 하나의 융합의 가능성을 전제하지도 않지만 연합할 수 있는 '공동-안에-있음'이 그들의 복수성이다. 타자 안에 있는 주체성이며, 거친 직결성 속에 들어온 꾸밈인 것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순간까지도 단일성을 만들지 않는 다양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다. 이들은 오직 '영원히 달아나는 관계'로서 서로의 타자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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