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의 순간 사라져 가는,

윤리와 무한 읽기(28),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3일

by 김요섭



네모 : 그러한 정신적 자식성의 예를 들어 주실 수 있는지요?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에 그런 것이 있을까요?


레비나스 : 자식성과 우애 -생물학적 기반이 없는 부모와의 관계- 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일반적인 은유입니다.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는 자식성과 우애로 환원되지 않지만 확실히 그것들을 포함합니다.


네모 : 선생님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성은 전적으로 타인이지만 동시에 나인, 낯선 이(이방인)와의 관계다. 그것은 똑같은 자신이지만 자신에게 낯선 자기와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시(詩)나 내가 만든 물건처럼 단순히 내 작품이 아니며, 내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향력의 범주나 데리고 있음의 범주는 아이와의 관계를 나타낼 수 없다. 원인 개념이나 소유 개념이 생산성에 관한 사실을 파악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의 아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는 어떤 식으로는 나의 아이이다. 여기서 '나는 있다'라는 말은 엘레아학파나 플라톤주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있다' 동사에는 어떤 다수성과 초월성이 내포되어 있다. 가장 대담한 실존주의적 분석에서조차 결여되어 있는 초월성이 내포되어 있다. 게다가 아들은, 예컨대 나의 슬픔이나, 나의 시련, 나의 고통처럼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아이는 하나의 자아이며, 인격이다. 끝으로, 아들의 타자성은 다른 자아의 타자성이 아니다. 부성은 내가 나 자신을 아들의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어떤 동감 같은 것이 아니다.


원인의 범주를 따라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범주를 따라서 자유가 이루어지고 시간이 성취된다. 부성은 단순히 아들 안에서 아버지가 새로워진 것이 아니며 아들과의 혼동도 아니다. 부성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외재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원주의적 존재함이다.




1.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외재성'은 존재자의 전체성에 환원되지 않는 바깥이다. '부성'은 아버지의 현존재에게 외재하는 것이자, 존재 속의 비존재이다. 전기원적으로 먼저 물러나 있던 타자성이며 '자식성'이란 관계 속에 전승 없이 전승된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연속성 안에서 자식성과 부성은 복수적 단수가 된다.


아들은 다시 시작된 비존재 속의 존재이며, 무한성 안에 지속하는 유한이다. 이는 '다원주의적 존재함'이자, 초월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부성'을 향하나, 각자의 전체성에 환원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성이다. 그들은 비존재이자 비어있는 것 안에 있으며, 절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일 수 있다. 각자에게 영원히 낯선 폴리폴니아적 주체인 것이다.



2.

그들의 아름다움은 결코 만져질 수 없는, 멀어지는 것과의 관계이다. 이는 계시받지 않은 계시이며, '나를 만지지 말라'는 무한성 안에 서로를 향한 어루만짐이다. '아버지의 범주를 따라' 자식성의 시간은 시작되고, 아버지와 다른 절대적 타자성으로 인해 아들은 자유롭다. 비로소 존재의 시간은 새롭게 시작되면서도 영속되는 진리 사건이 된다.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새로우나, 전통의 지평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된 미래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계시의 연속성은 보장된다. 죽음을 향하지 않는 존재는 갇힐 수밖에 없기에, 불안 속에 얼굴을 마주 봄으로써 초월은 이어질 수 있다. 이로써 원인의 범주에서는 단일한 전체성으로 환원된 것이, 아버지의 범주를 따라서는 절대적 타자성이 된다.


신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비존재, 영원히 바깥에 있으며, 망각과 기다림 속에서 계속 멀어져 가는 것과의 관계. 그 어떤 언어로 살해할 수도 없고, 살해되지도 않는 신성. 비로소 현현하는 아름다움. 그것은 결코 닮지 않은 아들이자, 아버지이며, 영원히 구속되지 않는 자유다. '자식성이자 부성'은 완성의 순간 사라져 가는, 원환(圓環)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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