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화되지 못한 전체성

윤리와 무한 읽기(29),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4일

by 김요섭



네모 : '전체성'과 '무한'은 어떤 점에서 서로 대립합니까?


레비나스 : 이 두 단어의 연계에 내포된 전체성에 대한 비판에는 철학사를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이 역사는 보편적 종합을 시도하는 것으로, 의식이 세계를 포용하며 의식 바깥에 다른 아무것도 남지 않고 따라서 절대적 사유가 되는 전체성으로 모든 경험과 모든 합리적인 것을 환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의식은 동시에 전체에 대한 의식입니다. 철학사에는 이런 전체화에 반대하는 항의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본질적으로는 헤겔에 관한 논의인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의 철학에서 처음으로 저는 전체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만났습니다.


비판은 죽음의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전체성 안에 병합된 개인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며 자신의 특수한 운명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개인은 전체성 안에서 쉼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전체성이 '전체화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젠츠바이크에게는 전체성의 붕괴가 있고, 그에게서 합리적인 것을 탐구하는 상당히 다른 길이 열립니다.


네모 : 어떤 길은 서양 철학에서 탐구되지 않았는데, 서양 철학은 그런 길보다 체계의 길을 압도적으로 선호한 것이죠?


레비나스 : 그것은 사실 헤겔 철학에서 절정에 도달한 서양 철학의 전 과정이며, 이는 매우 당연하게도 철학 자체의 귀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이 항상 지식 안에 거하는 서양 철학의 어느 곳에서든 이렇게 전체성에 대한 향수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전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상실이 정신의 죄라는 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는, 진리이자 정신에 그 모든 만족감을 부여하는 실재의 전모를 보여 주는 비전인 셈입니다.




1.

전체성은 분리된 존재의 부분적 인식이다. '거기 있음'의 시간성, 장소성을 잊은 주체성은 자신과 분리된다. 비로소 인식은 존재의 환원될 수 없는 여분까지 흡수하며 '절대지'를 획득한다. 시원적 순간 먼저 물러나며 주체를 열어 밝혀 주었던 타자성은 짓이겨진 채, 더욱 멀어져 간다. 밝혀지지 않는 것과 함께였던 복수적 단수는 존재를 상실한다. 코기토는 유일무이한 절대적 위치로 올라선다. 폴리포니아였고, 다양체였으며, 다성성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이는 '독단적 단수'로 남고 말았다.


그는 불멸의 시간을 획득한 듯한 감각을 가진다. 관조되는 것은 대상화되고 인식은 절대자의 위치에서 내려다본다. 그러나 도구적 이성은 대상을 지배하고 판단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전체성으로부터는 분리되지 못한다. 회의의 끝단까지 밀어붙이는 사유에 현존재가 발 딛는 조건에 대한 사유가 괄호 쳐져 있다. 절대적 타자로서 '죽음'이 코기토적 체계에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의도적 회피는 결코 실수가 아니다. '전체성 안에 병합된 개인은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며, 아예 없는 것처럼 치부한다. 방법적으로 전체에 더욱 천착하며, 체제의 아비투스를 자신의 것인 양 여긴다. 반성하지 않는 주체는 분명 죽음을 향한 존재이나, 자신을 향해 존재 물음을 던지지 못한다.


결국 인식은 아무리 '코기토'적 환원을 하더라도, 미끄러진다. 존재 질문이 빠져있기에 그가 원하는 '전체'로 다가갈수록 분리되고 마는 것이다. '거기 있음'의 조건을 사유하지 못하는 코기토는 본래적 실존을 깨닫지 못한다. 무한성의 어딘가로부터 끝없는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살 뿐이다. 존재 물음의 부재는, 결국 '전체성이 전체화되지 못함'으로 끝나고 만다.



2.

전체성 너머의 무한은 '죽음'을 모르는 의식에게 들어온 절대적 이질성이다. 초월성은 유한에 기입된 죽음이며, 시간성이다. 대상 없는 불안은 존재의 시간 가운데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 감정이다. 이는 일상의 전체도 아니며, 해명되는 부분도 아닌 '비언어'이다.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은 다만 물러나 있을 뿐이다. '빈자리, 부재하는 장소, 영원히 달아나는 것'으로 그저 있을 뿐이다.


'일리아'는 존재의 비어있음과 관계하고 있다. 그의 이해가 도달할 수 없는 시간, 끝까지 해명되지 않는 장소성. 그러한 '비어있음'의 틈으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작은 빛.

타자성으로 초월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화려한 이성의 빛이 결코 아니다. 오만한 코기토의 '빛없음', 판단 중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비로소 드러나는 비어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내재성. 멀리서 온 낯선 타자는 비로소, 도래할 장소를 찾는다. 일리아는 비인칭으로, 소유됨 없이 그저 있을 뿐이다.



3.

일리아와 함께, 주체는 전체성 없이 전체가 된다. 망각과 기억, 비의식과 의식의 경계는 인식 없이 드러난다. 결코 합일될 수 없는 두 개의 전체성은 각자성으로 그곳을 향한다.

성급한 합일 없이, 어떤 경계선도 공유되지 않은 절대적 다름으로, 함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영원히 다름에도, 전체일 수 있는 가능성이자, '절대지' 없이 단 하나로 묶는 아름다움이다. '미지(未知)의 지'로 보존되는 환대이자,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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