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30),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5일
네모 : 선생님은 이와 같이 거대한 철학 체계들을 특징짓는 이 총체화하는 비전을, 의미에 대한 또 다른 경험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시지요?
레비나스 : 환원 불가능하고 궁극적인 관계에 대한 경험은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종합이 아니라, 인간들의 대면(얼굴 대 얼굴)에, 사회성에, 그것의 도덕적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덕이 전체성과 전체성의 위험에 대한 추상적인 반성을 넘어서 부차적인 층위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해해야 합니다. 도덕은 독립적이면서 예비적인 범위를 갖습니다. 제일 철학은 윤리학입니다.
네모 : 단일한 지식으로 모든 의미를 궁극적으로 전체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시면서, 선생님이 '종합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윤리적 상황이 될까요?
레비나스 : 종합할 수 없는 대표적인 것은 분명 사람들 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또한 특히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신의 관념이 존재의 전체성의 일부를 이룰 수 있는지, 혹 더 정확하게는 존재를 초월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초월'이라는 말은 정확히, 우리가 신과 존재를 함께 사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격들 사이의 관계에서, 초월은 나와 타자를 함께 사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마주함의 문제입니다. 참된 결합이나 참된 조화는 종합의 조화가 아니라, 얼굴 대 얼굴의 조화입니다.
1.
일상성은 자기 범주 안의 움직임이며, 성급한 종합이다. 평균적 인간은 상징계의 질서에 포획된 것, 존재적으로 가까운 것, 욕망된 것만을 욕망하는 관성체이다. 이들의 '총체화'는 부분 욕망일 수밖에 없으며, 고착된 언어에 바르는 경화제(硬化劑) 일뿐이다.
또한 이들이 '새롭다'라고 말할 때, 전적인 새로움은 항상 제외된다. 인식의 달달함과 평균성을 넘어, 벽을 허물어버릴 정도의 강도는 집단 무의식으로 회피된다. 결국 완전히 새로운 것이 시작되게 하거나, 어떤 환원도 없는 아름다움의 도래는 불가능할 뿐이다. 평균적 일상성에는 체제의 아비투스를 자기 것인 양 믿는 부분체와 말인성의 종합으로 생긴 절지류(節肢類)의 요란한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2.
'궁극적 관계에 대한 경험'은 다른 장소에 있다. '신성'으로서 대타자(Autre)는 요란하게 회피할 수도 없으며, 달달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종합되지도 않는다. 타자의 도래는 상징계 속에 침투하는 날카로운 단도의 삽입이며, '테오리아(theoria)적 지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폭력이다. 어떠한 매개 없이, 그분 앞에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는 본래적 실존이다.
그는 더 이상 욕망된 것만을 욕망할 수 없으며, 인식으로 포획할 수도 없다. 이는 비관성의 호소이자,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의 요청이다. 결코 종합될 수 없고, 시시각각 변하며, 오직 그 차이를 환대할 수밖에 없는. 본래적 마주함이 '종합의 조화'가 아닌 '참된 조화'인 것이다.
3.
'단일한 지식으로 전체화할 수 없음'은 제일 철학으로서 윤리학이다. 입 속의 검은 혀로 대상화했던 '타인 자'를 '타자'로 환대함이 무엇보다 앞선 요청인 것이다. 이는 욕망된 것, 언어화된 것, 인식된 것의 해체를 전제로 한다. 주체의 좁은 머리 안에서 이해된 것 너머, 그 바깥이자 무한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인식의 칼로 살해했던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성급했던 자신의 혀부터 자르는, 서늘한 용기인 것이다. 이로써 대타자와 얼굴을 맞대고, 이전에 없던 언어로 노래하는 일은 가능해진다.
"시선은 죽이고, 노래는 살린다" - 모리스 블랑쇼
윤리의 요청은 단지 '그렇게 해야 함'이 아니다. 오히려 유책성의 인수로 발생하는 '시차'에서 들어오는 에로스이다. 먼저 혀를 잘라낸 자와 나중 된 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욕망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앞선 자와 뒤쳐진 자의 윤리적 '상처'조차 감싸는 아낌이기도 하다. 어떠한 기계적 공정, 법리적 평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식 너머의 사건이자, 제일 윤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