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31),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6일
레비나스 : 사람들 사이에는 모든 종합이 전제하고 있는 공통의 영역이 없습니다. 객관화된 사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하는 공통의 요소, 사람과 사물이 닮으려면 필요한 공통의 요소, 사람이 자신을 사물처럼 개별화하려면 거쳐야 하는 공통의 요소는 일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라이프니치의 표현을 따르면 참된 인간 주체성은 식별 불가능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주체성은 사람들을 한데 묶는 어떤 유의 개별자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체성의 비밀을 말하면서 이를 언제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 비밀을 조롱했지요. 말하기란 낭만주의적 사유에 좋은 것이라면서...
1.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은 동일화와 통합을 지향한다. 그는 자유로운 의식과 욕구를 통해 무엇을 선택한다고 느끼지만 자신의 아비투스가 체제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의 미감은 긍정성에 사로잡혀 있으며, 부정성을 회피하는 성과주체를 닮았다.
일차적인 것 밖에 없는, 다차적인 가능성이 소거되어 버린 존재는 기꺼이 성과사회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전체성은 그를 받아주기는 하나, 어루만져 주지는 않는다. 그를 부분적으로 필요로 하기에, 시스템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어딘가에서 쓸모 있게 죽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2.
유한성의 바깥, 시스템 외부로의 탈출을 모르는 단일한 주체성은 소비된다. 존재의 허기이자 여분은 상징계 속에서 해결되지 못하지만, 해결되어야만 한다고 강요받는다. '할 수 있음'의 강제는 생산뿐만 아니라 존재의 내밀한 감각까지 통제하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과 긍정성에만 치우친 삶의 형식이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감출 뿐이다.
'참된 인간의 주체성'의 언어를 찾지 못한 일차원적 인간은 우울하다. 그러나 부정성은 주체에게 재앙이기도 하나, 동시에 타자성의 미세한 흔적이자 초월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단일한 주체성에서 다차원적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 사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과주체는 진짜 성과를 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한다. '참된 인간의 주체성'으로 건너갈 수 있는 통로이자 미세한 균열은, 곧 경화제로 덮이고 만다. 지속하지 못하는 일차원적 인간은 합리화하는 언어를 찾으며 자위한다. '가성비가 맞지 않아, 유용한 것도 아니고, 어찌 될지도 모르는 걸' 결국 단일성이라는 허위의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는 계속 미끄러질 뿐이다.
3.
체제의 외부로 나가지 못하는 그는 존재의 허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미로 속에서 어떤 바깥도 찾을 수 없는 주체는 자신을 증오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너절하고 천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깥으로 갈 수는 없기에, 그는 관성적 미감에 따라 성급한 이웃사랑으로 전체를 향한다.
얼른 시스템에 안기고 싶은, 바람과는 달리 일차원적 인간의 진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체제의 부품으로써 '거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성이 전부라 믿었지만 그것마저 거부당한 일차원적 인간은 죽어갈 뿐이다. '거기 있어야만 하는' 존재자는 '거기 있음'의 존재를 상실한 채,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외화되어 간다.
자신의 전체성을 의심해 본 적 없던 '사유 없음'은 안타깝게도 소비된 후 버려진다. 시스템을 향한 짝사랑은 결코 어루만져지지 못한다. 정처 없는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기 있어야만 하는' 존재는 우울과 소진 속에 죽어간다. 시스템은 그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는다. 죽어감의 과정을 빅데이터화 하고, 의료 산업의 수익모델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일차원적 인간의 죽음은 순식간에 대체되며, 결코 애도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