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2)

[다른 사람들] 인문적 읽기 / 파놉티콘, 감시와 처벌

by 김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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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 권력


적십자 차량은 주인공을 머나먼 섬으로 호송합니다. 작은 틀로 옮기는 시술을 받으며 거인은 점점 왜소해집니다. 작은 배에 탈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지요. 남자가 자신의 모습을 잃고 축소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도시로 보내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진 그를 부모는 환대하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림책에서 수용소는 어느 외딴섬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체제에 맞지 않는 이를 재사회화하는 공간이 외부에 있다는 설정은 자연스럽습니다. 보통 감옥과 정신병원은 우리 주변에서 보기 쉽지 않지요.


그러나 개인을 규율하는 권력은 도시의 외부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했지요. 현대의 규율 권력은 감옥의 형태로 외부에 있기도 하고 우리 주변에 있기도 합니다. 더구나 CCTV처럼 상시적으로 작동하며 감시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파놉티콘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이 있습니다. 원형의 감시탑이 중심에 있고 죄수용 공간이 탑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원형 내부의 간수는 밖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지요. 간수가 몇 명인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여부를 죄수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공리주의자였던 벤담 답게 최소의 감시자가 많은 범죄자를 감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죄수가 감시자를 알 수 없고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은 스스로 검열하는 주체를 탄생시킵니다. 파놉티콘의 죄수들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감시 여부를 알 수 없을 때 발생하는 효과는 특별해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리적 폭력마저 필요 없게 만들지요. 처벌의 두려움을 내면화하기 때문에 통제가 용이해집니다.


미셀 푸코는 파놉티콘을 원형 감옥에서 근대 권력의 작동 원리로 확장시킵니다.

근대 권력은 이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특정한 공간에 설치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 항상 감시한다는 믿음이 상시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지요. 개개인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되면서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규율되고 통제되며 강력한 권력으로 작동됩니다.


이제 규율 권력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것처럼 존재'합니다.



카프카의 변신


다시 그림책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진 그를 부모는 환대하고 식사를 함께 합니다. 거인으로서 자신을 잃고 난 뒤에야 돌아올 수 있는 가족 공동체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작가는 가족의 식사 장면을 멀리서 부감하듯 그려내고 있습니다. 각진 빌딩 숲, 빼곡히 그려진 창문들 중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공간, 어느 곳에서 가족은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가족'이 아닌 '같은 가족'의 평온한 저녁의 모습이지요.


저자가 택한 제목 '다른 사람들'은 아이러니합니다. 정확하게 다시 붙인다면 '같은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지독하게 '동일성을 요구하는 타자 아닌 타자'들이지요.


도시 속 생존의 문제 앞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제한적 범위를 가집니다.

체제가 요구하는 역할 수행이 가능할 때, 가족의 울타리도 가능하다는 것에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만약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벗어난 이가 있다면 언제든 '가족애'라는 이름하에 규율 권력을 작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파놉티콘을 내면화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가족 공동체는 도시라는 규율 권력의 하부구조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높은 빌딩 수많은 창문 중 어느 한 가족의 모습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요.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의 비극은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그럼에도 어떤 일도 있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규율 권력을 내면화한 현대인에게 어떤 탈출구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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