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한 대화, 끝단의 사유

윤리와 무한 읽기(33), 레비나스 강독, 2022년 1월 28일

by 김요섭



네모 : 정치철학에 관하여 말씀 나누어 보시죠. 선생님은 [전체성과 무한]에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사회'개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회성'을 정초시키려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지요. "실제적인 것은 그것의 역사적 객관성 안에서 규정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비밀로부터, 내적 지향들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의 다원주의는 이러한 비밀에서 출발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는, 사태를 자유롭게 놔둘 때 사회가 더 잘 기능한다고 가정하는 객관적 사회이론, 곧 '자유주의'를 단순하게 그 사회의 기초로 삼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주의는 자유가 객관적 원리에 의존하게 할 뿐, 자유가 삶의 본질적 비밀에 의존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경우 자유는 전적으로 상대적인 것이 될 뿐입니다. 이런 자유는 우리가 어떤 정치적 관점이나 경제적 관점에서 주어진 조직 유형에 대해 더 큰 효율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는 목소리를 잃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정초 하기 위해서 '비밀'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념만으로 충분할까요?


레비나스 : [전체성과 무한]은 이런 방향으로 전개되는 저의 첫 번째 책입니다. 그 책은 상호 주관적 관계의 내용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부정적인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이고 부가적인 사회성과는 다른 이러한 사회성은 긍정적으로 어떤 것으로 구성될까요? 이것이 제가 뒤이어 몰두했던 문제입니다. 조금 전에 읽으신 문장은 오늘날 제게 본질로 보이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형식적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이성에 대한 평가절하나 보편성을 향한 이성의 열망에 대한 평가절하를 도출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제가 기술한 바와 같이, 바로 상호 주관적인 것의 요구로부터 이성적 사회의 필연성을 도출해 내고자 합니다.


작금의 의미에서 사회라는 것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원리에 제한을 가한 결과인지, 아니면 반대로 인간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리에 제한을 가한 결과인지를 아는 것은 극히 중요합니다. 제도 및 보편적인 형식과 법을 가진 사회는 인간들 사이의 투쟁의 영향을 제한한 데서 유래한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 대 사람의 윤리적 관계에서 열리는 무한을 제한한 데서 유래한 것일까요?




1.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은 본래적 실존과 유리된 시간성이다. 거친 직결성으로 객관적 역사는 '거기 있음'과 분리되어 있다. 존재의 각자성은 죽음이라는 필연적 공통분모에도 불구하고 다르며, 전혀 다른 것이다. 전체성으로서 역사는 이러한 차이를 털어내고 일광욕을 시킨 뒤에 나온 객관성인 것이다.


존재의 본래적 시간은 현전의 형이상학이자 인식론적 환원이 '중단'될 때 시작된다. 레비나스적 판단중지를 '비밀(실제적인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코기토의 가혹함이 중단되고, 객관성의 폭력도 사라진 시간, 그 비어있음에 '비밀'은 그저 있을 수 있다. 존재는 불가해함 속에 이해되어야 '다원적으로' 거기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

자유주의가 다원적 사회를 보장한다는 신화는 거짓이다.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주는' 것으로 진정한 정의는 도래할 수 없다. 어떤 유책성의 인수도 없는 곳에서, 단 한 번도 시작된 적 없는 새로움은 불가능하다. 최고의 윤리이자 역사상 한 번도 도래한 적 없던 '사회성'은, 적당한 타협이나,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계산으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전쟁'은 잠시 유예될 뿐이다.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형용모순 속에 '거기 있음'의 본래적 실존은 요원할 따름이다.


각자가 자신도 모르던 몫까지 이르는 '단독성'과 지배 없이 전체를 이루는 '공통체'의 조화는 실현된 적 없다. '부재하는 참된 삶'이자 '비밀'을 대체한, 자유로운 그곳에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양화된 정보가 필요할 뿐이다. 합리적이고, 차이를 양적으로 구별하며, 매끄럽게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사회성'만이 요구된다. '자유주의'는 신비의 '절대성'이 망실된 채, 오직 '상대적' 효율성만이 남을 뿐이다. 각자의 몫을 정확히 판별하기 위한 검찰적 수준의 물음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존재는 살해될 뿐이다.



3.

레비나스가 비밀로서의 타자성이 사회성을 정초 하는데 절대적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이성에 대한 평가절하나 보편성을 향한 이성의 열망에 대한 평가절하를 도출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사유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근원적 지점에서 이기적'이기에 규제를 필요로 하는 사회가 요청되는 것인지, 아니면 '본원적 지점에 타자를 환대하려는 욕망'에 제재를 하고 있는지이 여부이다.


즉발적으로 드는 생각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일 뿐, 그의 사유는 순진한 거야'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그러나 '타자를 품는 주체성'으로의 '비밀'은 관성적이며, 손쉬운 타협으로 끝날 수는 없다. 존재 속에 결코 이해되지 않는 비존재, 비의식과 같은 '알 수 없음'은 아직 사유되지 않았다. 자아는 타아적인 것과 관계 맺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으며, 타인 자들은 끝없는 대화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난 이기적 동물이야'라며, 존재 물음을 끝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객관적 원리'로서 자유주의는 결코 '삶의 본질적 비밀'에 다가가지 못한다. 합리성의 요구는 본래적 자아와의 관계를 철저히 파괴하며 각자의 독백만이 남게 한다. 존재 물음으로 타자성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가 요청된다. 시원적 사건에서 주체성과 타자성의 관계, 존재 내의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 진정 사랑하는 관계에서의 욕망이 끝단까지 사유되어야 한다. 이는 근원적 물음이자 본래적 실존에 다가가는 끝없는 대화이다. 여기에 적당한 타협이나 가성비를 따지는 합리성, '난 이기적이야'라는 자유주의는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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