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라운드(2020),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 영화 읽기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크'는 그곳을 향한다. '사랑의 시대(2016)'에서 공동-내-존재로서 함께 그곳이 가능한가에 대해 보여주었다면, '어나더 라운드(2020)'에서는 바쿠스(Bacchus)의 힘을 빌어 그곳으로 가려는 현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함께' 그곳으로 향하는 현존재와 여러 불일치로 인해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차이나는 지점도 있다. 축제 이후의 축제를 지속하는 존재의 서늘함에 대해 말하는 '어나더 라운드'는 감독의 사유가 더 나아갔다는 점이 반갑기도 했으나, 영화가 다소 평면적인 느낌이었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1.
감독의 '그곳'은 사랑의 장소이자 시간성이다. 계산과 판단이 들어오지 않는 시원의 시간이자, 둘의 관계에서 절대적 타자성이 머무는 장소 없는 장소이다. 각각의 전체성이 '전쟁'하지 않으며, 함께 그곳을 향하는 모습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랑의 시대'에서는 혈연관계 없는 이들이 공동생활을 시작한 뒤, 나체로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어나더 라운드'에서는 무감해진 현존재의 시간이 알코올의 힘을 빌어, 축제의 순간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은 유한성 속에 있으면서도, 순간 저 멀리서 온 별빛이자 무한성에 합일된 존재로 자신 너머, 그곳에 있다. 이는 너무도 모호하면서 동시에 너무도 확실한 열정이며, 지배 없는 종합이자, 총체적인 자신으로 '거기 있음'이다.
2.
그러나, '그곳'은 완성의 순간, 사라져 간다. 헤테로토피아적 시간은 메마른 유한성에 단비와 같은 축복이지만, 현존재에 도래한 순간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히 유한자로서 넘지 못할 울타리를 넘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는 영원 같은 순간 이후 낭떠러지로의 추락이 예정되어 있음을 아는 서늘함이기도 하다.
"불꽃놀이는 예술의 완전한 형태다. 완성의 순간, 보는 이의 눈앞에서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아도르노
축제의 시간은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그만큼의 강도로 살아내야 하는 일상은 감당하지 못한다. 봄날 이후를, 봄날처럼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 무한까지 이르렀던 이는, 추락 이후 밀려오는 존재의 허기를 쉽게 감당하지 못한다.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은 그들의 '과거의 실패'(키에르케고르의 불안, 영화 대사 中)와 단절되지 못한 채, 돌이킬 수 없는 흉터로 남는다.
3.
인물들의 공통점은 '그곳'이라는 아름다움의 덮개가 사라진 뒤 확고한 중심성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중심 없는 중심으로 축배의 노래를 부르며 춤추던 이들이, 이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일상으로 귀환한다.
그들의 존재방식은 이성적이자, 계산적이며, 관성적인 점에서 본래적 실존과 분리되어 있다. 자신의 일부만을 자신의 전부라 여기며 사는 것이다. 그들의 부분적 전체성이자 허위의식은 생존하고 있으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자기의식과 '거기 있음'이 분리된 채, 밀려드는 허기에 신음할 뿐이다. 그 비어있음을 비어있는 채로 환대하지 못하기에, 위선과 가식이 곰팡이처럼 그곳으로 스며든다. 존재의 헛헛함은 극복될 수도 없지만, 어떤 언어도 없는 존재는 계속 어려울 수밖에 없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던, 지금 여기 없는 존재. 영원히 멀어져 가고 있는 그곳은, 다름 아닌 그들의 본래적 장소이며, 실존이다. 동시에 비의지이며, 비존재로서 환대받지 못한 타자이자, 자기 자신이다.
영화에서 마주한 진실은 여기 있다. 지금도 계속 멀어져 가고 있는 '그곳'의 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정처 없음을 각자의 강도로 살아내는 일 없이 일상의 축제는 없다는 진실이다. 이는 죽음 앞에 선 각자성의 서늘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남다른 강도일 것이며, 어쩌면 그것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