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2)

「행복한 청소부」 인문적 읽기 / 일상의 균열, 예술적 삶을 위한 빈틈

by 김요섭



일상의 균열


주어진 일을 해내는 삶으로도 충분했던 청소부의 일상에 예고 없는 균열이 찾아오게 됩니다.

청소부가 막 닦아 놓은 거리 표지판을 가리키며 아이가 외쳤어요. "저 아저씨가 글자의 선을 지워버렸어요!.... 저기요. 글뤼크 거리라고 해야 하잖아요?"


행복을 뜻하는 ‘글뤼크(Glück)’라는 글자를 청소부 아저씨의 ‘지나친 청소 행위’로 의미 없는 글자인 '글루크'가 되었다고 판단한 아이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겉으로는 아저씨가 청소를 열심히 해서 한 획이 지워졌고, 의미 없는 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메시지는 한층 더 깊이 숨어있습니다.


청소부의 반복적인 노동은 '먹고사는 일'입니다. 이는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삶의 목적이 단지 생존이라면 인간을 동물과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노동에만 집중하는 인간이 상실한 '한 획'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가 상실한 하나는 무엇일까요?


문제를 제기했던 아이가 의미 없는 글자라 생각했던 '글루크'에서 단서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실존 인물인 글루크는 18세기 오페라를 개혁한 독일의 작곡가입니다. 청소부가 닦던 표지판은 그의 예술적 성취를 기념한 거리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던 것이죠.


그는 오랫동안 간판을 닦았지만 거기 쓰여있던 작곡가 '글루크'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아이가 글뤼크여야 한다고 오해했던 간판을 청소부 역시 의미 없는 글자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것이 청소부가 상실하고 살아가던 한 획이자 '행복(글뤼크)'이 아닐까요?



예술적 삶을 위한 빈틈


‘행복(Glück)이란 단어는 빈틈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투명사회, 한병철」


생존만을 위한 노동은 '행복(글뤼크)'이 부재하는 삶입니다. 경제적인 것이 전부인양 사는 이는 결코 ‘글루크(독일 작곡가)’로 은유되는 예술적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지요. 청소부 아저씨는 여태껏 ‘빈틈’ 없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소국 국장이 칭찬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요. 하지만 빈틈이 없는 곳에는 행복이든, 사유든 어떠한 예술적 영감과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라는 한병철의 문장을 곱씹어 보고 싶습니다. 체제가 요구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은 '폭주하는 기차처럼, 삶이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것'(발터 벤야민)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작곡가를 알고 그의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선로를 이탈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조건과 아름다움


잠시 멈춰 서서 지금 글을 읽고 있는 시간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림책을 깊이 읽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일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돈이 되는 시대에 예술적 삶을 상상하고, 인문학을 읽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 수 있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름다움’은 일상에 빈틈을 주고 새로운 상상력을 선물합니다. 빈틈에서 자라난 생각은 차이 없는 일을 반복하는 존재를 사유하게 합니다. 멈춰 서서 자신의 기계적인 행동을 관조할 수 있게 하지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그에게 허락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것은 직선로를 곡선으로 바꾸는 창조적 행위이자, 예전에 없던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일입니다.


사유 없는 노동의 대가로 계좌에 입금되는 숫자로 환원되지 않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

'나는 그 이상이며, 너머의 존재라는 자각의 시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생성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 함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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