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36), 레비나스 강독, 2022년 2월 2일
네모 : 전쟁 이야기들은 실제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게 어렵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레비나스 : 얼굴은 의미작용인데, 맥락 없는 의미작용입니다. 저는 올곧은 얼굴을 한 타인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님을 말하고자 합니다. 통상 우리는 한 '인물'입니다. -소르본느의 교수로, 최고 행정법원의 부원장으로, 아무개의 아들로, 여권에 기재된 사항들로, 옷 입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있습니다. 인물이라는 말이 보통 뜻하는 모든 의미작용은 이렇게 맥락과 관련합니다. 즉, 어떤 것의 의미는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반면 여기서 얼굴은 그 자체로 의미를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보이지'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은 당신의 사유가 포용할 만한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얼굴은 담아낼 수 없는 것이며 당신을 저편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얼굴의 의미작용이 지식과 관련된 존재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봄(vision)은 일치를 찾는 일입니다. 봄은 존재를 흡수하는 대표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얼굴과의 관계는 곧바로 윤리적인 것입니다. 얼굴은 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적어도 그 의미가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살인은 참으로 우리가 타인을 죽일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입니다.
윤리적 요구는 존재론적 필연성이 아닙니다. 살인 금지는 그 금지의 권위가 악을 성취하려는 나쁜 양심 -악의 교활함- 에 머물러 있더라도 살인죄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는 또한 사람의 인간성이 세상에 관여되는 만큼 그 인간성이 드러나는 성서 속에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존재 안에 이러한 '윤리적 낯섦' - 사람의 인간성 - 이 나타난 것은 존재의 전복입니다. 이 전복은, 존재가 갱신되고 회복된다 하더라도 유의미합니다.
1.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다. 독이 잔뜩 오른 뱀처럼, 날 선 검은 웅크리고 있는 몸을 향한다. 얼굴을 묻고 있는 완벽한 타인을 내려다보며 씩씩댄다. 어떤 변명도 그의 미감에 맞지 않는다. 자신의 울타리 밖에 있음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고,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남자의 동일시의 욕구 속에 타자성은 산채로 해부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그녀는 그의 미감에 맞지 않는 부분을 난도질당한 뒤, 인식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날 선 것이, 순간 타자성의 갈비뼈 아래로 들어간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본다. 비로소 둘은 '얼굴과 얼굴로 마주한다' 칼에 찔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있는 '약함'은, 노출된 얼굴을 다시 베일 뒤로 숨긴다. 손잡이가 붉게 물들며, 그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든다. 기습할 수 없는 '무방비'는 온유함이다.
그녀는 끔찍한 통증 속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의 눈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얼굴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기에 '윤리적 낯섦'이다. 남자는 머뭇거린다. 비로소 완고한 확실성에 심각한 균열이 일며, 절대적 낯섦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의 얼굴은, 그로 하여금 시원적 윤리로 향하게 한다.
2.
'본다'는 타인을 죽이고, 전리품을 획득하는 의미작용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보이는 순간 계속 멀어지며 '맥락 없는 의미작용'으로 나아가는 '얼굴'이 있다. 의식이자 관성의 맥락으로 '빨려 들어 감' 없는 의미는 '비의미'이자, 인식 너머로 향하는 얼굴이다. 이는 의미작용이자 동시에 맥락 없는 의미작용이라는, 전언철회적 존재 방식 속에서만 생성되는 최고의 윤리인 것이다.
'시선은 죽이고 노래는 살린다' - 모리스 블랑쇼
'존재 안에 이러한 윤리적 낯섦(사람의 인간성)'은 자식성을 향한 에로스이기도 하다. 낯섦을 통해 폐위되는 관성이자 동일성은, 단 한 번도 시작된 적 없는 '타자성 속의 주체'를 잉태하게 한다. 너무도 쉽게 존재를 살해하고, 같음의 지옥에 있던 이를 오직 절대적 타자성만이 빠져나올 수 있게 한다. 주체는 비로소 '주체성 없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