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 타인은 얼굴입니다. 하지만 또한 타인은 나에게 말하고, 나는 그에게 말합니다. 인간의 대화 또한 선생님이 '전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깨트리는 한 방식이 아닙니까?
레비나스 : 확실히 그런 방식입니다. 얼굴과 대화는 묶여 있습니다. 얼굴은 말을 합니다. 얼굴은 말하는데, 모든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시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저는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기술하기 위해 봄(vision) 개념을 일찍부터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대화이고, 더 정확하게는 응답 또는 책임이며, 이것이 곧 진정한 관계입니다.
네모 : 그러나 윤리적 관계가 앎 너머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관계가 틀림없이 대화를 통해 가정되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앎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레비나스 : 저는 언제나 실제로 대화에서 말함과 말해진 것을 구별해 왔습니다. 말함이 말해진 것을 담아내야 한다는 점은, 법, 제도, 사회적 관계를 통해 어떤 사회를 강요하는 질서와 동일한 것의 필연성입니다. 그런데 말함은 얼굴 앞에서 내가 단순히 얼굴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응답한다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말함은 타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방식이지만, 타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자체가 이미 타인에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현전 속에서 침묵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이 어려움은 말해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함의 고유한 이 의미작용 속에 그 궁극적 토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어떤 것에 대해, 비가 오는지 해가 나는지에 대해 말하는데, 어떤 말이든지 누군가에게 말해야 하고 누군가에게 응답해야 하며, 그에 앞서 그 누군가에 대해 책임져야 합니다.
1.
대화는 전체성 너머, 초월의 가능성이다. 레비나스의 '말함'은 상대주의적 독백이 결코 아니다. 자신으로 반향되는 언어는 타자로의 '초월'이나, 고통에 응답하는 '책임'이 부재해있다.
자유주의자의 언어는 자신의 전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협애함 속에 머문다. '적당한' 동정이나 관심은 그들의 삶의 양식이며, 타자의 얼굴은 자기 회귀적 동일성에 응답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낯섦이나, 책임질 수 없는 요청은 살해된 채, 주체의 인식으로 포획될 뿐이다.
2.
그들의 침묵은 비언어가 아니다. 차이 없는 반복이며, 적극적인 비개입이자, 자신의 언어로 감싸안는 전체성이다. 그러나 동일자에게 초월의 순간마저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과부, 고아, 가난한 자'의 얼굴은 갑자기 현현하며, '약함'으로 그들을 올려다본다. 타자의 얼굴은 단일함에 균열을 내는 '느닷없는' 폭력으로, 상징계를 뚫고 다가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타자성의 도래에 상대주의적 자유는 일시적으로 중지된다. '약한 자'의 침묵은 동정과 멸시의 느슨함이 아닌 '책임'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연약함의 자유'이자, '비언어 속의 언어'에 공명하지 못한다. '아직 시기상조이며, 여건이 마련되면...'이라는 식으로 말꼬리를 흐린다. 도저히 타자의 '약함'을 감당할 수 없는 '적당함'은, 강도 만난 이웃을 내버려 두던 이들처럼 서둘러 얼굴을 회피할 뿐이다.
3.
독백의 언어 형식은 '약함'과 관계할 수 없다. 어떤 '비밀'도 없이 노출된 '약함'은 포르노그래피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봄(vision)과 관조는 호모 사케르로 나타난 '얼굴 너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자유주의자의 '앎'은 표면적인 얼굴로서 페이스(face)를 볼뿐이다.
그들의 관심은 아케이드에 전시된 상품의 구매를 결정하는 자유와 관계한다. 언제든지 소비되고, 버릴 수 있는 것과 등격이 된 타인 자는 절대적 아름다움이자 근원적 윤리로 도래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타자를 추방한 이들에게 삶은, 생존으로 전락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