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광고의 성격인 '중화뉴스'를 '영웅아녀' 이후로 연기한다. 이는 남자가 류가녀를 돕기 위해 소동을 벌인 상황 때문으로 설명되지만, 감독의 분명한 서사 전략이기도 하다. 영화가 지시하는 1초를 향한 시간을 조금 더 미루는 관능인 동시에 진짜 본편을 위한 배치인 것이다.
그들의 엇갈림
남자와 류가녀는 서로 엇갈린다. 그가 '류'남매를 괴롭히는 이들과 싸우는 도중에 맡긴 필름을 들고,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힘들게 닦아낸 필름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딸의 영상이 담겨있기에 그는 포기할 수 없다. 남자는 류가녀의 집까지 찾아가 어린 동생에게까지 횡포를 부린다.
다시 상영관으로 돌아온 그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해 그녀를 찾는다. 아무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 류가녀의 얼굴을 영사실 뒷문에서 발견한다. 영화 속에 없던 딸아이는 영사실 뒷문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필름을 잃어버린 줄 알았으나, 그녀는 영사실에 맡겨놓고 나와 있었던 것뿐이었다. 오해가 풀린 그는 마음을 열고, 딸의 얼굴을 바라본다. 비로소 영상과 실제가 중첩된다.
이 겹침은 남자를 잡으러 온 공안과 싸우다가, 함께 사로잡힌 장면에서 확실해진다. 공안은 포획한 전리품처럼 그들을 묶어두고 상영기사에게 영화를 틀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남자와 류가녀만 보지 못했던 영화를 같이 보게 된다. 마침 아버지를 잃은 딸이 진짜 아버지를 찾는 장면이 나오고, 그때 류가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남자는 자신의 아픔이 가장 가까이 있는 그녀의 아픔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마지막 시퀀스에도 반복된다. 사로잡힌 남자는 노동교화소로 이송되고, 그때 류가녀가 배웅하러 나오게 된다. 사막 반대편 언덕에서 진심 어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서로를 향해 어루만지듯 손을 내밀던 그때, 갑자기 공안이 남자의 호주머니를 뒤진다. 딸아이의 얼굴이 담긴 필름 한 컷(영화기사가 선물해 줌)을 빼앗기고 만다. 공안이 사막에 던져버린 것을 다시 줍기 위해, 남자는 발악을 해보지만 속절없이 끌려갈 뿐이다.
그때 류가녀가 멀리서 달려와서 떨어진 종이를 줍는다. 그녀는 제대로 주웠다고 생각하고 손을 흔들고, 멀리서 끌려가던 남자 역시 안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장면은 마지막 씬에서 밝혀지지만, 제대로 주운 것이 아니다. 필름은 신문지 조각에 싸여 있었고, 류가녀는 진짜 얼굴이 담긴 필름 대신, 비어있는 신문 조각을 찾았을 뿐인 것이다.
남자가 딸의 얼굴을 그녀가 찾았다고 안심하고 끌려가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이는 연민으로 연결된 관계가 '비어 있음'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며 혈연관계없는 가족의 탄생인 것이다. 순간 필름 속 진짜 딸의 얼굴은 모래에 덮이고, 딸 같은 류가녀의 얼굴이 서로 겹쳐진다. 서로의 극단적인 상처는 그렇게 공명하며,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도 타자를 향한 초월마저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다.
1초
감독은 엇갈리는 장면과 설정을 통해 서로의 아픔에 다가간다.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혈연관계없는 이들이 진짜 가족이 되게 하는 과정까지 이르게 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1초는 단지 영화 후반부에 반복 재생되는 딸의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삶 곳곳에 도래한 기다림이자, 그저 있음으로 상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는 찰나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주체의 어찌할 수 없는 순간 타자의 어루만짐을 통해, '완성 없이 완성되는' 사랑을 그는 1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일상에 이미 물러나 있는 비인칭적 있음은, '할 수 없음'이자 서로의 비어있음이 공명하는 순간이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1초이며, 동시에 누구에게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시간성이다. 그것은 영원히 멀어지는 것에게 다가가는 관능이자, 초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