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은 죽이고 노래는 살린다(8)

드라이브 마이 카(2021),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 읽기

by 김요섭



"왜 당신이 '바냐'역을 하지 않죠?" 다카즈키는 묻는다.


"체호프의 극은 나를 끌어내는 힘이 있어. 그래서 나는 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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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파편적 전체성


가후쿠가 '바냐' 역을 맡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자기 동일성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관성 때문이다. 4살밖에 되지 않은 딸의 죽음을 안고 사는 삶, 많은 말이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이나 결코 말해지지 않은 서로의 이야기. 지주막하 출혈로 인한 갑작스러운 오토의 죽음. 아내와 진실한 대화를 회피했기에,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20년의 결혼 생활 중 '부재해 있는 것'은 결국 파국으로 그들을 이끌고 만다. 끝나버린 둘의 에로스는 껍데기만 남은 채 파편적 전체성으로 왜곡된다.


가후쿠와 오토의 관계는 관능에 이르는 듯 보이나, 표면적일 뿐이다. 서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으나, 서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로 환원될 뿐이다. 말해지지 못한 것, 계속 멀어지는 것에 다가가지 못하기에 그들은 말할 수 없이 상처받는다.


에로스는 타자성에 가닿지 못하기에 관계는 자위로 전락하고 만다. 서로의 깊은 상처에 다가가지 못하는 둘은 '비어 있는' 것을 어루만지지 못하기에 이미 깨져있다. 얼핏 매끄러운 듯 보이는 결혼 생활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마주하지 않기 위한 도피이며, 동일자의 관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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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음'과 대리 보충


'비어있는'것을 공명할 수 없는 관계는 대상으로 전락하며 수단화된다. 오토에게 가후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기 위한 존재로 치환된다. 또한 관계의 안정을 추구하는 가후쿠에게도 이러한 '대리 보충'은 매력적인 거주성으로 타협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생활은 차이 없이 정주될 수 있다.


드라마 작가에게 남편은 타자의 얼굴이 아니며, 창작의 동업자이자 생활의 동반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와의 이야기가 끊어질 때, 오토에게 있어 관계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소녀 이야기를 남편이 들었음에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건에서 분명히 시작된다. 그녀는 무엇인가 결심한 표정으로 '오늘 저녁에 꼭 할 말이 있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급작스런 죽음으로 오토의 말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그녀의 죽음이 지시하는 것과 그날 저녁에 말해질 이야기는 동일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가후쿠 역시 다르지 않다. 오토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동일자의 관성 속에 아내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녀는 타자성을 상실한 채, 그의 전체성을 유지시키는 부분이자 부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아모르파티


파편적 전체성이자 관성으로 유지되던 관계의 파국은 예견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윤택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며, 사랑하는 것 같지만 분명한 것은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비어있음'은 빼놓고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먼저 물러나 있는 타자성이자,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의 진리는 결코 포기되거나 대리 보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거기'에 '정주함 없이 도착'한 주체성이 되지 못했기에, 그들은 진실로 공명하지 못한다. 불가능은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남을 뿐이며, 말할 수 없는 상처는 전해지지 않는 편지로 남는다.

계속 멀어지는 것으로 딸의 죽음은 죄책감이라는 단일성으로 환원되고, 서로의 '현재'는 후회와 동일성의 욕구로 머문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를 살아갈 뿐, 앞을 향해 반복되는 '아모르파티'를 품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아름다움은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것이다.



"체호프의 극은 나를 끌어내는 힘이 있어. 그래서 나는 할 수가 없어." - 가후쿠 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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