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지요. 전형적인 패턴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어쩌면 스테레오 타입이 없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단순한 일부터 깊게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지요. 현실의 우리는 타협하게 됩니다. 기존 관념에 비추어 즉각 개념화해버리지요. 자신의 준거틀에 맞춰 버리면 일상은 쉽게 판단되며 해석의 수고로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짧은 판단 속에 그만큼의 세계는 있지만, 사라집니다. 청소부가 표지판의 '글루크'를 몰랐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유 과정을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요?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통해 사물을 인식합니다. 신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를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지각' 능력. 지각한 형상을 개념으로 요약하는 '오성' 능력이 있지요.
우리의 신체가 감각한 것을 오성은 해석해내며 이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판단 중지의 미학
예를 들어 볼까요? 청소부는 표지판을 볼 때 이러한 과정을 거칩니다.
우선 눈으로 초록색 표지판과 글루크라는 글자, 주변의 때가 묻은 형태를 '지각'할 것입니다. 시각을 통해 들어온 감각 정보를 청소부의 '오성'은 분석합니다. 지각 정보를 판단하며 '표지판에 때가 많이 묻었네, 닦아야 해.'라고 명령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체계를 분석한 칸트의 설명이 명쾌한가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나요?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의 순간을 이해하기 위해 여기서 '멈추고 사유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우선 초록색의 표지판 색, 글루크라는 글자가 먼저 떠오릅니다. 감각을 더 열어 본다면 이 순간의 햇볕과 함께 불어온 산들바람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오성은 신체가 감각한 것을 개념으로 '요약'하는 과정에서 단순화시켜버리고 맙니다. 쓸모없다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지요. 표지판을 요약하는 것은 그래도 좀 괜찮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 요약해버리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의 계좌에 있는 월급 혹은 생활비, 시험점수로 당신을 판단해버리면 어떨까요? 동의하시겠어요? 여러분은 숫자로만 환원 가능한 존재인가요? 표지판도 다시 보니 '글루크'라는 변수가 있는데, 하물며 여러분의 존재를 어떻게 하나의 개념으로 포획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숫자로 판단당합니다. 무의식 하에 요약하는 것을 동의하기도 하지요. 사유하지 않으면 시스템의 '호명'에 의해 바로 환원당하고 맙니다. 혹시 잘 이해가 안 되시나요? 그럼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요?
환원될 수 없는 우리
'청소부'로 호명된 이의 판단 과정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호명 주체'(루이 알튀세르) 속에서 '오성'이 내린 판단에는 제거된 것이 있지요.
제가 다른 연재 글에서 여러 번 말씀드리고 있지만, 시스템은 우리를 요약하려고 합니다. 돈이 되지 않거나 체제에 방해되는 우리의 여분을 지워버리려고 하지요. 알튀세르가 이야기하듯 체제는 우리를 요약하여 '호명'합니다. '청소를 잘하십니다'라는 청소부 국장의 말이 생각나시나요?
청소부로 호명되는 시스템의 논리에서 우리는 요약되고, 소비되며, 사라집니다. 이 논의는 더하면 길어지니 다른 글에서 하기로 하고요. 다시 아름다움에 집중해봅시다.
그럼 '오성'으로 개념화하지 않고 표지판을 본다고 상상해볼까요?
이 순간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말입니다. 어떤 선입견과 고정관념 없다면 말입니다. '무지의 베일 Veil of ignorance'(존 롤스)을 쓰는 것과 같은 원초적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때, 오성의 명령으로 수면 아래 잠겨있던 지각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비로소 표지판의 색과 글루크라는 글자가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또한 청소부가 '글루크'라는 작곡가를 알게 된다면 예술적 사유가 진행될 수도 있지요. 청소부 역할에만 충실한 호명 주체로는 불가능했던 아름다움이 아이의 말에서 발화된 빈틈을 통해 열리게 되었지요.